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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김천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역사인물<하>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2.05.23 17:17 수정 2022.05.23 17:17

예부터 영남제일문향으로 큰 인물 배출
‘택리지’에 사대부가 대를 이어 사는 고장으로 칭송

임진왜란 공신 효숙공(孝肅公) 배흥립(裵興立)

↑↑ 배흥립 묘소

배흥립은 본관이 성산(星山)으로 영산현감을 역임하고 좌찬성으로 추증된 배인범(裵仁範)과 정경부인 경주김씨 사이에서 1546년(명종 1) 김산군 조마면 새래(신안)에서 태어나 자를 백기(伯起), 호를 동포(東圃)라 했다.
조모인 한양조씨가 마당에 장군깃발이 서 있는 꿈을 꾼 후 태어났다고 전하는데 과연 기골이 장대했다 하며 5세에 외조부인 황주목사 북일(北逸) 김익(金瀷)에게 수학하면서 훗날 대사헌이 된 구봉령(具鳳齡), 영의정에 오른 유영경(柳永慶) 등과 동문수학했다. 특히 병서(兵書)에 관심이 깊어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어찌 문무를 따지랴”고 했다고 전한다.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으로 봉직하다 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여진족을 소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무장, 경성, 흥양 등 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이때에 이르러 모친인 경주김씨가 병환이 깊어 머리를 빗지 못해 이가 생겨 가려움에 시달리자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옆에 누워 이가 옮겨오도록 했고 유산으로 받은 전 재산을 아우인 의범(義範)에게 주며 “나는 녹봉으로만도 충분하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세상에 알려져 칭송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권율, 이순신 장군과 함께 행주, 당포, 옥포, 견내량, 진도, 칠전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우고 이순신 장군의 천거로 공신에 오른 후 장흥부사와 전라도방어사,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올랐다.
1605년(선조38) 선무공신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1607년 영흥부사로 나아갔다가 득병해 그 이듬해인 1608년 졸하니 선조는 예관을 보내어 조문케 하고 효숙(孝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뒷날 인조 때 원종공신, 병조판서, 좌찬성이 추증되고 효종 때 정려가 내렸으며 대방산 묘소 아래 예조판서 강백년(姜栢年)의 비명(碑銘)으로 신도비가 세워지고 순조 때 삼강사(三綱祠)에 제향됐으며 한산도 승전비에 공의 공적이 기록되고 부조지전(不祧之典)이 내렸다.
효숙공의 행장(行狀)은 실학의 선구자로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집필자인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짓고 행록(行錄)은 선조(宣祖)의 부마(駙馬)로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도총관 유정량(柳廷亮)이 닦았다.
효숙공은 정경부인 청송심씨와 여산송씨 사이에서 4남 3녀를 뒀는데 삼남 시량(時亮)이 1630년 무과에 장원 급제한 후 양주목사, 도총부부총관, 경상, 충청, 전라 삼도의 병마절도사를 두루 역임했다. 공의 손자이며 장남 선무랑 시망(時望)의 차남인 명순(命純)은 1624년 무과에 급제한 후 병자호란 때 선전관으로서 인조를 호종하며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다 전사해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란 시호와 함께 부조지전을 받았다
효숙공의 모친인 경주김씨 또한 만고의 열부로서 남편이 병사하자 3년상을 마친 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진하니 1656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고 정경부인으로 증직됐다. 조마면 신안리 안새래마을에는 열부 경주김씨부인과 임란공신 효숙공 배흥립, 병조호란 때의 공신 충숙공 배명순 등 3대를 칭송하는 삼대삼강정려각이 세워져 명문가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임진왜란 의병장 학촌(鶴村) 박이룡(朴以龍)

↑↑ 박이룡 묘소

박이룡은 충주박씨로 1533년(중종 28) 8월 15일 서울에서 영천부사를 역임한 박성건(朴成楗)과 흥덕장씨의 7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자를 시윤(施允), 호를 학촌(鶴村)이라 했다.
어려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561년(명종 16) 진사시를 거쳐 1577년(선조 10) 문과에 급제했으며 1577년(선조 10)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그 이듬해 예조정랑(禮曺正郞),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580년(선조 13)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사간원정언으로 봉직하면서 당시 동서로 나눠 분당에 골몰하는 관리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상소를 수차례 올릴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지녔는데 이것이 화근이 돼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1583년(선조 16) 모친상을 당해 동생과 더불어 5년간 시묘살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밤낮으로 지켜줬다는 일화가 전한다.
선생의 효성과 높은 학문이 알려져 각계의 추천으로 선조가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591년(선조 24) 59세에 해서순찰사(海西巡察使)라는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무고(無告)로 인해 1592년 원주로 유배를 당했다.
이 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면을 받고 향리인 황간으로 돌아와 친척과 마을의 장정 500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해 군호(軍號)를 황의장(黃義將)으로 칭하며 당시 왜군 후방사령부로서 4만명이 주둔하던 격전지 개령을 공략하기 위해 김천 하로마을에 진을 쳤다.
선생은 김천일대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여 전공을 세웠는데 첫 번째 전투인 부상고개에서 영동군수 한명윤(韓明胤), 상주목사 김해(金邂), 상주판관 정기룡(鄭起龍) 등과 합세해 3차례의 공방전 끝에 적을 물리쳤다.
1592년 10월 초에는 지례전투에 참가해 1천500명의 왜병을 몰살시키는 전공을 거뒀으며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김면(金眄),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등과 성주성 공격에 나서 홀로 적병 20여명의 수급을 베기도 했다.
또 개령에 주둔했던 적병이 공자동과 우두령을 넘어 거창으로 진격하려는 것을 막기도 했는데 1593년 1월 부상전투에 참가해 분전하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때 말에서 떨어져 적의 포로가 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영동군수 황명윤과 강절(姜節)이 도와 목숨을 건졌다.
나라에서 능성현령과 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듭 재수해 능성현령으로 봉직하다가 1593년 4월 30일 지난 부상전투에서의 부상이 덧나 능성현 관아에서 63세를 일기로 순직하고 말았다.
‘교남지(嶠南志)’에 “박이룡은 충주인으로 율곡 이이의 문하생이다. 문과에 진출해 현감으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해 동생과 함께 시묘살이를 할 때 호랑이와 함께 했다. 사람들이 벼슬을 주고자 했으나 사양하고 임란 때 의병을 모았고 정호가 비를 세웠다”고 적었다.
선생이 졸하자 전라감사가 관군을 동원해 영동군 원평으로 시신을 운구해 반장했다가 문중에서 1615년 황간현(현 김천시 대항면 덕전리) 세송산으로 이장했는데 1940년 경부선 철로를 복선화할 때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장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의 12대손인 박해근(82세)씨에 따르면 영동에서 세송산으로 이장할 때 유명한 지관이 “이 자리는 물 없는 배가 지나갈 자리이다”라고 해서 모두들 의아해했는데 세월이 흐른 후 기찻길이 나면서 다시 이장하게 돼 모두들 신기해했다고 한다.
1812년(순조 12) 영호남 사림들의 상소로 이조참의로 증직이 됐으며 1991년 매곡면 공수리에 공적비가 세워졌다.
선생은 사친(事親), 사군(事君), 사형(事兄) 등 3남 1녀를 뒀는데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부친을 따라 김천땅에 정착한 이래 봉산면 태화리 가매기 마을에 차남인 사군(事君), 대항면 복전마을에 삼남인 사형(事兄)의 후손들이 집성을 이뤄 살고 있다.

민족사학을 일군 여성교육자 최송설당

↑↑ 최송설당 묘소

최송설당은 1855년(철종 6) 김산군 군내면 문산리(현 문당동)에서 화순최씨 최창환(崔昌煥)과 경주정씨 사이에서 무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대사성을 지낸 최사로(崔士老)의 후손으로 조선시대 말까지 문무를 겸비한 명문가였는데 증조부 최봉관이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에 연루돼 후손들이 전라도 고부로 유배가면서 집안이 기울어졌던 것이다. 김천으로 이주한 부친은 서당을 개설했는데 이때 부친으로부터 받은 엄격한 교육적 환경이 훗날 송설당의 교육관과 여류문인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낸 배경이 됐던 것이다. 부친이 1886년 별세하자 조상의 한을 풀어 드리기로 맹세하고 재산을 정리해 1894년 상경하기에 이른다. 당시 민비가 시해되고 고종이 엄비를 총애해 왕자출생을 갈구할 때였는데 송설당이 왕자탄신을 발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출산용품을 진상한 일이 계기가 돼 영친왕의 보모상궁으로 입궁하게 된다. 이로부터 1907년 영친왕이 일본으로 떠나기까지 10여 년간의 궁중생활을 하며 고종으로부터 조상의 죄를 벗는 신원(伸寃)을 받았고 많은 재산을 모아 고향 김천에 무수한 자선을 베풀었다. 또한 당대의 지식인들과도 당당히 교류하며 여류문인으로서 한시 259수와 국문가사 50편을 남겼는데 ‘소나무(松)’라는 시를 통해 송설당의 웅혼한 교육관을 엿볼 수 있다. 담장 안에 심은 소나무 한 자 남짓하여 가지와 잎 몇 성상 겪었냐고 물었더니 내 나이 이미 늙음을 비웃기나 하듯 다른 날 동량됨을 보지 못 하리네. 수많은 업적 중에서도 김천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세운 것이 으뜸이었는데 1930년 학교 설립을 위해 당시에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32만원이 넘는 전 재산을 선뜻 출연했던 것이다. 조선에 대한 우민화정책으로 실업학교만을 허가하던 총독부의 방해공작을 거뜬히 물리치고 1931년 인문계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했는데 이것은 식민지배를 벗어나는 길은 사립학교를 통한 민족정신 함양에 둔 송설당의 강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길이 사립학교를 육성해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 잡고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동양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마땅히 이 길을 따라 지키되 내 뜻을 저버리지 마라.” 송설당은 1939년 이 유언을 남기고 85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꿈에도 그리던 여사의 소원이 헛되지 않아 김천중고등학교는 개교 이래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무수한 동량(棟樑)을 배출한 명문사학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김천중고등학교 뒷산에 자리한 최송설당의 묘는 고성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직지천 너머 구화산을 안산(案山)으로 삼아 북향하고 있다. 여사가 정걸재를 건립한 그 이듬해인 1920년 음택지로서 가묘를 잡을 때 전국 최고의 지관을 초청해 고성산 일대를 돌아보게 했는데 당초 지관은 지금의 학교 기숙사 터를 길지로 잡아줬다고 한다. 그러나 송설당은 끝내 이를 사양하고 두 번째로 꼽은 자리에 자신의 가묘를 만들게 했는데 훗날 그 자리에 학생들이 원대한 꿈을 펼치는 학교기숙사가 들어섰으니 후학에게 좋은 묘터마저 양보한 송설당의 혜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자료제공: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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