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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제77주년 광복절 특집- 일제강점기 김천인이 펼친 독립운동의 역사<하>

권숙월 기자 입력 2022.09.21 15:50 수정 2022.09.21 15:50

김천은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해 역사적으로 잦은 외침
대한제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치열한 국권회복 노력
55명의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 배출한 충열의 고장


국채보상운동
1907년 1월에 일본의 외채를 갚아 일본의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전국적인 민중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
당시 구한국의 일본에 대한 외채가 1천300만원으로 너무 많아서 국가 재정으로는 갚을 능력이 없었다. 한국정부의 경제정책에 일일이 관여해 일본 차관을 늘려 예속을 심화시키고 정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고서 부터는 급격히 외채가 늘어났다. 국가는 국가대로 일본 자본에 예속됐지만 민간은 민간대로 일본 자본의 노예가 돼 이 약점을 이용해서 구한국의 정권을 농락해 자주적인 갱생이란 생각할 수 없게 된 상태였다.
일이 이에 이르게 되자 대구에서 광문사(회장 김광제)·대동광문회(회장 박해염) 등 16명의 애국계몽운동가가 발기해 ‘국채 1천만원 보상 취지서’를 전국에 돌리니 호응을 크게 얻었다.

이 운동의 요지는 대한국민 천만이 담배를 끊어 1인당 1달간 담뱃값 20전(1원은 100전)씩 3개월간 저축하면 국채를 갚을 수 있으니 단연 금주로 돈을 모으자는 것인데 대구에 ‘국제 지원금 수습사무소’를 먼저 설치하고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 운동을 언론기관에서 적극 지원해 서울에서는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게 되니 삽시간에 전국에 파급됐다. 방방곡곡에서 금주단연회가 조직돼 성인들은 자발적으로 담배 끊기와 술 안 마시기·덜 마시기가 실행됐고 여성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내놓는가하면 시골 농민들은 땔나무 한 짐 더하기로까지 확산돼 삽시간에 231만 999원 13전이란 거금이 모였다
김천 지방에 있어서도 같은 해 2월 20일 군 단위 김천금주단연회가 조직되고 뒤따라 각 면에도 조직됐다.

국채보상운동에 크게 놀란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대한매일신문사 내에 설치한 국채보상지원회 총합소의 간부 양기탁을 근거도 없이 국채 보상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금했다. 그런가 하면 송병준 등의 일제 앞잡이 일진회로 하여금 의연금 횡령으로 보상회 간부 몇 사람만 살찌운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하자 국채보상 운동은 점차 쇠퇴해 갔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의 각계각층 대중들을 애국계몽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그 후 3·1시위 같은 국민적 국권회복운동에 맥을 잇게 했다. 요즈음 담배는 건강을 해치고 생명을 단축한다 해도 금연은 줄어들지 않을 만큼 습관성이 강한데 건강상 유해를 모르던 당시의 금연·금주가 전국에 파급됐음은 실로 애국심의 깊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일제강점기 시위운동
김천 3·1운동

1919년 3·1 만세시위가 서울에서 일어나자 그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퍼지기 시작했다.
김천에서는 황금동 장로교회 조수 김충한(金忠漢 김천시 황금동, 계성학교 출신, 36세)이 서울에서 3·1독립운동을 목격하고 김천에 돌아와 김천에서도 거사를 단행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3월 8일 대구에서 크게 벌어진 독립시위운동이 학생 주동이었는데 이에 참가했던 김수길(金壽吉 금릉군 증산면 금곡리, 계성학교 학생, 18세)이 시위 대열에서 빠져나와 김천에서 거사키로 결심하고 그 길로 김천으로 달려 와 그날 밤 황금동교회로 김충한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때마침 장로 최용수와 교회 조수 한명수도 함께 있었다. 김수길은 대구 학생 의거 소식과 세계정세를 설명한 다음 조선 독립의 좋은 기회임을 강조하면서 김천 거사를 역설했다.

김천에서의 거사를 결심하고 있던 김충한은 두 사람의 의기투합에 모두 찬성하게 됐다.
밤 9시에 다시 황금동교회에 모였는데 이 자리에는 주남태(김천시 남산동, 농업, 21세)·김원배(김천시 용호동, 23세)·박태언·차경곤(김천시 황금동, 재봉업, 21세) 등이 동석했다.
김충한·김수길은 독립운동에 관한 경고문을 작성하고 최용수·김수길·박태언은 인쇄, 인쇄물 배포는 김수길·박태언이 담당하기로 했다. 또 경고문에 김천 거사의 민족 대표로 김충한과 최용수의 명의로 인쇄한다는 데에 합의했다.

한편 김수길은 베(布)로 태극기를 제작하고 주남태·김원배는 종이로 많은 태극기를 만들어 두기로 하고 거사일은 3월 11일 하오 3시, 장소는 용두동 감천다리 부근으로 정했다.
거사의 순서는 군중이 모이면 먼저 조선 독립에 관한 연설로 시작해 모인 군중에게 경고문과 종이 태극기를 나눠 주고 베로 만든 태극기를 선두로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가를 행진 시위하기로 했다.

모든 세부 계획이 끝나고 10일부터 본격적인 준비를 서둘렀다. 3월 10일 김충한과 김수길은 황금동교회에서 “금번 만국평화회의의 좋은 기회를 맞아 우리 조선은 독립할 운이 왔음을 고한다. 우리는 타국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민이 돼 천부의 행복을 누려야 한다…….”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기초했다.

그날 밤 남산동에 있는 최용수의 집에서 당시 금융기관인 김천저축계로부터 빌려온 등사판으로 경고문 300여 매를 등사했다. 또 주남태·김원배는 종이 태극기 50여 본을 만들어 10일 상오 9시 황금동에 있는 한상태의 집으로 운반해 김천공립보통학교(김천초등학교 전신) 학생 한정이·석동준(김천시 용호동, 어물상, 20세)·학생 박희철 등에게 나누어 주면서 다음날 거사 장소에 많이 모이도록 했다.

석동준은 11일 이들로부터 받은 태극기 16본을 들고 김천공립보통학교로 가서 학생 김종호 등에게 나눠주면서 하오 3시에 의거 장소에 참가하도록 다짐하고 한명수(황금동교회 조수, 27세)는 교동의 교회로 달려가 교동 사는 김재위(농업, 36세)와 허학선 등에게 의거 장소에 참여하도록 종용했다.
이러한 거사 준비가 주도면밀하게 끝나고 11일이 됐다. 정해진 시각 하오 3시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경고문을 등사한 등사기를 저축계 사무실로 돌려보내는 사람의 뒤를 미행하던 경찰에게 등사 원고지가 발각돼 황금동교회에 모여 있던 주동인물 4명이 검거되고 말았다. 따라서 계획했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에 연루돼 많은 사람이 검거됐는데 재판에 회부돼 5월 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과 형량은 다음과 같다.
김충한(金忠漢) 징역 2년
김원배(金元培) 징역10개월
최용수(崔龍洙) 징역 1년 6개월
한명수(韓明洙) 징역 10개월
주남태(周南泰) 징역 10개월
김재위(金在緯) 징역 6개월

용두동 시위운동
1922년 3월 11일의 제1차 김천에서의 독립시위거사가 탄로나자 일본경찰의 경계는 더욱 삼엄해지고 무장한 기마헌병대가 동원돼 시가지를 누비면서 물샐틈없는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울분을 참지 못한 애국청년들이 있었다. 3월 24일 밤 11시 김인수·김윤상·최응수·김영훈 등이 감호동 조일영 집에 청년 20여명과 함께 모였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들 4인은 즉시 경찰에 체포돼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각각 태형 90대씩이 언도됐다.

개령 시위운동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을 갈망하는 민족의 함성이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자 개령면 동부리 주민들은 3월 24일, 4월 3일, 4월 4일, 4월 6일 4차례에 걸쳐 독립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벌였다.
제1차는 3월 24일로 이날 개령보통학교(현 개령초등학교) 졸업식인 동시에 학부모 은창서의 집 혼인 잔치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피로연 도중에 김태연(金泰淵 일명 金丹冶)의 주동으로 허철·전종수·최영돈 등은 전국 각지에서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고장에서는 이런 거사가 없는 것은 수치라며 거사하기로 합의했다. 하오 4시가 돼 피로연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일장의 연설을 하고 이들 4명이 선두에 서서 유동산으로 향해 행진하니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이 시위 대열에 참가해 시위대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조금 뒤 무장한 헌병 기마대가 달려와 선두를 가로막고 총을 쏘아 흩어졌으며 그 가운데 2명이 체포됐다.

이 일로 김태연·허철·전종수·최영돈이 재판에 회부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태형 90대 언도를 받았다.
제2차는 4월 3일로 동부동에 사는 문정환이 동료 2명과 마을 뒷산인 감문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불렀고 제3차는 4월 4일 문정환·홍득린·문학이 등이 같은 산에서 만세를 불렀다.
제4차는 4월 6일 밤에 동부동에 사는 머슴들이 역시 횃불을 들고 감문산에 올라 만세는 부르면서 시위를 했는데 이에 가담했던 김임천·도동영·김명길·최가만 ·정남준·황도석·이말용·윤광어리·김타관 등 9명이 검거돼 재판에서 90대의 태형 처벌을 받았다.
증산 시위기도

김천시 증산면에서도 거사계획이 있었다. 증산면 소재지인 유성리 옥동에 있었던 쌍계사의 승려 이봉정·김도운·백성구 등이 협의해 4월 5일 밤에 평촌리 뒷산에서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날 낮 군중 동원을 위해 증산면 유성리 동장 최상철을 찾아가 이 계획을 알리면서 주민 동원을 부탁하고 또 평촌리 동장 김도원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면서 주민동원을 부탁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거사 직전에 누설돼 주동 인물 가운데 이봉정·김도원이 검거돼 재판에 회부되고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징역 10개월의 언도를 받았다.

김천헌병대 만세시위

서울에서 있었던 3·1 독립시위운동의 소식을 들은 조마면 신안리 주민 최무길은 4월 5일 하오 8시 혼자서 평화동에 있는 일본헌병분대 구내에 들어가 “대한독립 만세!”를 3창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 구금돼 모진 매를 맞고 재판에 회부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태형 90을 언도받았다.

6·10 만세운동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의 최후 황제인 순종이 53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전 국민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인산일은 6월 10일로 정해졌다. 일경은 3·1 독립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유언비어와 반일적 행동을 감시했다.
일제는 경성을 비롯해 평양·함흥·원산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육·해군 모두 7천명을 집결시켰으며 부산 및 인천항에는 제2함대를 대기시켜 놓고 인산일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한국 민중들의 거사에 대비했다.

이 같은 상황 아래 권오설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계열의 이선호·이병립·박두종을 중심으로 한 사직동계 및 이동환 김재문을 중심으로 거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계는 사전에 일경에 탐지돼 주동자는 모두 체포되고 격문도 압수당함에 따라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주도하게 됐다.
이때 조선공산당계에서 체포된 인물 중 개령면 출신 김태연이 포함돼 있었다.
드디어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맞아 인산을 애도하는 40만 백의종군의 물결이 온 장안을 뒤덮었으며 돈화동에서 홍릉까지 도열한 학생 수는 약 2만4천여 명에 달했다.

이날 오전 8시 40분경부터 학생들을 중심으로 가두투쟁이 벌어진 것을 시작으로 거리 요소요소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났으나 곳곳에 배치돼 있던 일경에 의해 제지되고 21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학생들 시위 도중 많은 민중들이 이에 호응하자 당황한 일경이 총을 난사하는 등 저지에 나섰지만 학생들과 시위 군중들은 그칠 줄 모르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체포된 사람은 210명이었고 이 가운데 106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검거된 학생들은 모두 54명이며 이 가운데 경북도내 출신은 6명, 김천 출신은 1명으로 김천군 김천면 황금정 73-1번지에 주소를 둔 중앙고보 4년 임종업(林鍾業 20세)이었다.
                                                                  <자료제공 :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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