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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칼럼- 별처럼 늙어 가자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5.01.15 08:37 수정 2025.01.15 08:42

정성천(수필가·전 김천여중 교장)

요즈음 많은 노인이 늙어 간다는 것을 “익어간다”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오죽하면 인기 가요의 가사에도 “우리는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고 했겠는가? 이는 육체의 낡아짐보다는 내면의 완숙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동경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늙어 간다는 것이 정말로 익어가는 것일까? 달콤하게 익어가는 대부분 열매는 씨앗 번식을 위한 미끼로 작용한다. 그러면 달콤하게 익어가서 다음 생을 위해 무얼 유혹이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어디까지가 익어가는 늙음이 될 것인가?

육체의 동력이 전과 같지 않다는 느낌을 이제 갓 느끼는 오십 대 후반, 육십 대 초로의 노인들은 자기의 늙음을 이렇게 익어간다는 말로 표현해도 무방하리라. 그리고 그런 말로 마음을 위로하며 내면을 가다듬는 삶의 지침으로 삼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칠십 대가 늙어 가는 게 아니라 익어 간다라고 표현한다면 과연 격에 맞는 표현이라 할 수 있을까? 너무 익어 감식초가 되어버린 홍시의 맛을 생각나게 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는 않을까?

그러면 칠십이 넘어 늙어 간다는 것은 어떤 현상일까?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에 따라 늙어 가는 현상도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흔히들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가 가고 싶어 한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산다는 것은 주위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 자재로움을 누리며 산다는 것인데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살 수가 있을까? 수많은 인연의 끈을 달고 하루에도 수십 번 서로 밀고 당기며 칠십 년 이상을 살아 온 사람이 과연 바람처럼 구름처럼 늙어 갈 수가 있을까? 고승이나 득도를 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늙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노인은 바위로 살고 싶다고 한다. 이는 굳건한 바위와 같은 자존심으로 산다는 말일 게다. 이런 삶도 세파가 거세게 몰아치고 마음에 흔들릴 것이 많았던 젊은 시절에 선망했던 삶이 아니던가? 하지만 바위와 같은 자존심을 내세우며 매사 깐깐하게 늙어 가는 노인도 있다. 아니 세월에 따라 쌓인 분별심으로 자존심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속이 더 좁아지는 노인도 있다. 그러다가 바위와 같은 그 단단한 면이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도 한다. 그래서 자존심이 강한 노인은 주위를 불편하게 만든다고 모두가 피한다. 차츰 친구가 떨어져 나가고 마음의 문은 닫히고 점점 더 고독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바위 같은 자존심도 허물어지는 육체의 쇠락 앞에서는 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끝내는 마지막 자존심도 지켜낼 수 없는 육체의 배신에 실망하며 산산이 허물어져 내리고 아득한 슬픔만 쌓인다. 그런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고독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늙는 것이 바람직한 늙음인가? 사람은 빛의 모습으로 산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늙어 간다는 것은 빛을 조금씩 잃어 가는 것이다. 빛이란 스스로 존재한다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늘 타자를 환하게 밝혀 빛나게 하는 것이 빛의 속성이 아니겠는가? 늙을수록 사람을 특히 친구를 자주 만나야 한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장 우리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사람은 허물없는 친구이다. 우리는 늙을수록 빛을 잃어 희미해져 가지만 친구를 만나면 긍정적인 에너지로 서로 환하게 빛날 수 있는 것이다.

어저께 경기도 광주시에 볼일 보러 갔다가 수인 분당선 미금역 인근에서 고교 동기생 4명이 당구 모임을 한다기에 만나 점심을 같이하고 당구 게임을 옆에서 관전한 일이 있었다. 그곳에는 얼마 전에 아내를 잃은 친구도 있었고 허리 통증이 너무 심하나 친구들 얼굴 보러 나왔다고 말하며 허리에 찬 복띠를 보여주는 친구도 있었다. 서로 웃으며 주고받는 온화한 말과 눈길 사이에서 나는 환한 긍정의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빛으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 우리는 자기만의 고유한 빛으로 이 세상을 밝히는 하나의 발광체인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빛으로 행복해질 수도 있고 나 또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하나의 빛이 될 수도 있다. 빛을 내보내는 그리고 또 빛을 받아들이는 나의 렌즈가 맑을수록 그 빛은 더 투명해져 나도 너도 더 밝아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렌즈는 마음이다. 마음을 맑게 닦자. 마음을 맑게 닦는 일이란 마음을 자주 들여다보는 일이다. 노인일수록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맑은 마음의 소유자는 맑은 눈빛, 얼굴빛, 언어의 빛으로 상대방에게 맑은 행복의 빛을 보낼 수 있다. 그리고 상대방이 보내는 빛을 맑게 받아들여 쉽게 공감하고 행복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별의 일생도 젊은 별일수록 차가운 푸른 빛에서 차츰 백색으로, 황색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따뜻한 느낌을 주는 붉은 색으로 바꾸면서 늙어 간다. 우리도 밤하늘 별처럼 빛나고 늙어 가자. 빛의 세기는 점점 더 약해져 가나 점점 더 따뜻한 빛으로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노인이 되자. 그리고 서로에게 빛이 되기 위해 우리 자주 만나 환하게 웃자.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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