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지방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이다. 1990년 구성공단 조성과정에서 구성면 송죽리 감천변에 신석기와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면서 확인됐다.
김천은 예로부터 산이 깊고 물이 맑아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으로 불렸는데 본격적인 역사시대의 시작은 삼한시대의 소국 감문국으로부터 비롯됐다. 감문국은 낙동강 중류의 큰 지류의 하나인 감천유역의 비옥한 평야지와 편리한 교통을 기반으로 개령면, 감문면 일대를 중심으로 성립됐다가 서기 231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에 의해 병합돼 이때부터 김천은 신라의 역사 속으로 편입됐다.
삼국시대의 김천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국경에 위치해 주변국간 충돌이 잦았다. 교통이 편리해 문물의 교류가 활발했으며 특히 고구려를 통한 신라불교의 유입이 김천을 통해 이뤄졌다.
서기 418년(눌지왕 2)고구려의 승려인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된 직지사는 선산 도리사와 함께 신라땅에서 두 번째로 창건된 천년고찰로 신라에 불교를 확산하는 포교의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신라 말기에는 승전대사에 의해 갈항사, 도선국사에 의해 청암사와 수도암 등 고찰이 차례로 창건돼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다. 또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접경에 위치한 사통팔달의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일찍이 역이 들어서고 도로가 발달해 조선후기에 들어 시장이 크게 번성했다.
경상, 충청, 전라 삼도가 함께 이용한 큰 장이라 해서 삼도장으로도 불린 김천장은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까지 대구, 개성, 평양, 전주와 함께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서 교통과 물산의 중심으로 부상해 1949년 도내에서는 대구에 이어 두 번째로 시로 승격하기에 이르렀다.
본지에서는 김천시 승격 70주년을 기념해 문화유산을 통해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문화재를 소개하게 됐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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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사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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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08호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
현재 김천지역에 소재한 유일한 국보로서 1982년 국보 제208호로 지정됐다.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도리사(挑李寺)에서 출토됐다. 도리사는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 눌지왕 대에 창건한 신라불교의 초전지로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이 사리함은 신라 8세기의 전형적인 금동사리함으로 판명됐는데 도리사 창건 이래 전래된 불사리(佛舍利)를 금동육각사리함과 함께 조선시대의 석종부도에 봉안한 것이다.
출토된 사리는 도리사 세존사리탑에 봉안하고 금동육각사리함은 동국대학교에서 보관하다가 1995년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국보 제99호 갈항사 삼층석탑
남면 오봉리 갈항마을의 갈항사삼층석탑은 일제강점기초까지 김천에 있었으나 현재는 서울 국립박물관에 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현장조사 결과 탑의 정확한 조성경위가 명문으로 기록된 유일한 탑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적 관심을 모았다. 1962년 국보 제99호로 지정된 후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석조박물관에 있다. 이 탑은 758년(신라 경덕왕 17년)에 38대 왕위에 오른 원성왕의 원찰로서 갈항사에 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동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명문은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娚者靈妙寺言寂在思旅( )( )姉者照文皇太后君嬭在旅( )( )妹者敬信大王嬭在也(경덕왕 17년에 원성왕의 생모인 박씨와 원성왕의 이모 그리고 외삼촌 언적등 3인의 발원으로 탑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탑은 4.3m, 서탑은 4m로 동탑은 상륜부가 사라졌고 서탑은 3층 옥계석 부터 유실된 상태다. 서탑의 기단부에서 경전을 기록한 종이와 청동사리호, 금동사리병이 수습되어 대구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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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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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45호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은 남면 오봉리 갈항사터에 남아있는 1.22m 크기의 불상으로 예부터 두상만 노출된 채 매몰되어 있던 것을 주민들이 발굴, 관리해오다 1963년 보물 제245호로 지정됐다.
오른쪽 무릎 일부와 오른손이 훼손되고 하대석과 광배가 없다. 나발은 구슬을 연결한 연주문(連珠紋) 형태로 낮고 둥근 육계는 동시대에 조성된 경주 석굴암 석가여래좌상과 유사하다. 8세기 중엽 유행하던 우견편단의 법의는 오른쪽 어깨에서 옷깃을 한번 뒤집는 인도 굽타시기 조각의 형태를 하고 있다. 넓고 당당한 어깨와 팔의 근육, 잘록한 허리, 육감적인 인체비례는 8세기 중엽 불상의 특징이며 경주 석굴암 본존불과 유사하다.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얹고 손가락을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이며 왼손은 오른쪽 발바닥 위에 얹고 있다. 상대석의 앙련(仰蓮) 조각이 수려하다.
두드러진 눈, 긴 코, 작은 입, 둥글고 풍요로운 얼굴에 신비로운 미소가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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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보살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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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 296호 수도암 석조보살좌상
1963년 보물 제296호로 지정된 수도암 석조보살좌상은 수도암 약광전에 봉안돼 있다. 4각형 대좌에 문양 없는 원통관(圓通冠)을 쓰고 두 손은 법계정인(法界定印)을 하고 보주(寶珠)를 들었으며 광배(光背)는 거신광(擧身光)으로 연화문·당초문, 화염문을 새겼다.
문양 없는 관을 쓰고 있어서 보살처럼 보이지만 가지런히 모은 두 손에 약합을 들고 있는 수인으로 볼 때 약사여래로 볼 수 있다. 대좌의 상대는 양련(仰蓮), 중대는 안상(眼象), 하대는 복련(覆蓮)을 조각했다.
금오산 약사암의 약사여래, 직지사 삼성암 약사전의 약사여래와 함께 한 석공이 조성해 의형제를 맺었는데 그 중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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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암 삼층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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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 297호 수도암 삼층석탑
수도암 대적광전과 약광전 전각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선 보물 제297호 삼층석탑은 859년(신라 헌안왕 3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청암사와 수도암을 창건하면서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탑은 단층기단 위에 섰고 서탑은 각 면에 한 개씩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마련한 삼층석탑이다. 두 탑의 수법이 서로 다르며 한 쌍의 탑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조각과 모양도 다르다.
그러나 두 탑의 1층 탑신 4면에 여래불상이 양각돼 있는데 그 수법이 단아하다. 동탑은 단층기단이고 서탑은 각 면이 1개씩의 장대석으로 조성돼 있다. 동탑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보륜이 남아 있고 서탑 상륜부에는 노반, 보주가 남아있다.
도선국사가 옥녀직금형의 명당으로 전해지는 수도암 터에 절을 지을 때 이 두 탑은 선녀가 베를 짜는 베틀의 두 기둥이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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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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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307호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수도암의 대적광전에는 보물 제307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크기와 양식에 있어 신라 하대 9세기경의 불상을 대표하고 있는데 높이 251m, 무릎 폭 210cm, 어깨 폭 140cm, 대좌높이 119cm로 경주 석굴암 본존불보다 80cm 낮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비로자나불 특유의 수인인 지권인을 취한 당당한 체구이며 상부에 비해 하부의 무릎 부분이 다소 빈약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로자나불상인 국보 제26호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의 뒤바뀐 손 모양을 바로잡기 위해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얼굴은 네모지고 풍만하며 눈이 길고 코를 작게 표현했다. 대좌는 팔각으로 상대에는 16엽, 단변연화문을 새겼고 귀면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숙종 때 우담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 “절 들어가는 입구에 석불이 앉았는데 소박하고 진실히 절을 지키고 있으며 또한 교모하기만 하다. 이보다 더 큰 석불을 보지 못했고 그 모습도 엄연하고 비범하다. 대석에 새긴 조각도 역시 기묘하기만 하다”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수도암 입구의 노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과 관련한 전설이 내려오는데 경남 거창의 불당골에서 제작한 이후 규모가 워낙 거대해 완성을 하고도 수도암까지 운반할 방도가 없어 난감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행색이 초라한 노승이 불쑥 나타나더니 돌연 불상을 등에 지고 수도암을 향해 달려갔다. 수도암에 거의 다 왔을 즈음 칡덩굴에 발이 걸려 넘어졌고 이에 노승은 크게 화를 내며 수도한 산신령을 불러 “귀한 부처님을 모시는데 하찮은 칡이 방해를 해서야 되겠느냐. 당장 절 주위의 모든 칡을 없애라”고 호통을 친 후부터 수도암 주변에는 칡이 자라지 않게 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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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31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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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319호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
원래 직지사 입구 사적비 부근에 있었으나 1979년 약사전을 신축해 봉안했는데 현재 성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955년 국보 제475호로 지정됐다가 1963년 국보와 보물로 구분되면서 보물 제319호로 재지정됐다.
이 불상은 불신과 광배가 화강석의 한 돌로 조성되고 결가부좌와 향마촉지인에 약호를 든 약사여래불상이다.
배 모양의 광배 안에는 당초문, 외연부에는 화염문을 배치하고 드리워진 법의자락이 화려하다. 정좌한 무릎과 전체가 균형 잡힌 비율로 배분돼 아름답고 양감이 두드러지나 파손이 심해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정리 : 권숙월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