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차를 몰고 나설 때마다 ‘어느 길로 갈까?’하고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옛날에는 무조건 ‘君子는 大路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이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물론 그 말의 진의는 사나이라면 모름지기 큰 포부를 지니고 남자답게 뜻을 펴면서 인생을 살아가라는 좌우명으로서의 말이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정말 바르게 크고 곧은길로 살아가기가 무척 힘이 들고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급행을 타고, 남보다 더 좋은 조건에서 힘들이지 않고 가급적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에 너무도 잘 길들여진 우리네 풍속도인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현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것은 사실이다. 길을 떠나기 전에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를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은 상식으로 되어 있다. 물론 길이 막혀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고 비행기를 못 타기도 하는 세상에 좁은 샛길을 택한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보통 샛길을 많이 아는 사람은 운전은 물론 세상 물정에도 밝으며 모든 일에 다박다식하고 요령이 풍부한 사람으로 통하기도 한다. 길이 꽉 막힌 대로를 용하게도 피하여 샛길을 요리조리 귀신같이 잘 빠져나가는 사람, 교통법규를 어기면서도 딱지 한 번 떼이지 않고 무사통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치 온 국토를 자기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 눈으로 살펴보며 길을 찾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기야 어차피 正道보다는 요령이 더 잘 통하는 세상 아닌가? 병원에 가서도 아는 의사라도 있으면 얼마나 쉽게 그리고 빨리 진찰을 받는지 모른다. 정말 고맙고 기쁘기 이를 데 없다. 돌아와서는 이웃들에게 어느 병원에 친구가 있어 가자마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아침 일찍부터 병원을 잦아 아는 사람이 없어 차례를 기다리다가 나보다 늦게 진료를 받은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이다.
어디 병원뿐인가? 행정기관, 일반 사회단체, 공공 기관에서의 각종 민원의 일들은 원칙을 벗어난 수많은 샛길을 이용하고 있다. 학연, 지연, 혈연, 모든 방법을 총 동원해서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하고 있다. 직장 생활은 어떤가? 말없이 묵묵히 정도를 따라 일을 하는 사람은 사회에서나 직장에서 간혹 뒤로 처지게 되고 수단과 방법이야 어떻든 남보다 빨리 일을 완성하는 약삭빠른 사람에게 승진과 출세의 기회가 부여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크고 넓은 정도(正道)보다는 쉽고 편리한 샛길을 택하고 있다. 짧은 안목으로 볼 때 샛길이 더 바람직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빠르고 편리한 것만이 최고요 전부는 아니다. 내가 편리한 샛길을 택했을 때 나 아닌 다른 사람은 나 때문에 힘들고 불편한 길을 택하든지 아니면 나와 함께 좁은 샛길에서 시기와 질투로 고통을 함께 해야 경우가 생긴다. 우리 모두가 샛길을 잘 아는 현명한 사람들일 경우를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힘이 안 드는 좋은 자리에 있는 나무가 아니라 가장 불편하고 어려운 후미진 곳에서 힘들게 자리한 버팀목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를 튼튼히 받쳐 주는 기틀은 대부분 위험하고 더럽고 힘들고 궂은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어떻게 보면 어리석고 요령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우리 속담에 “약빠른 고양이 밤눈 어둡다”라는 말이 있는데 약빠른 고양이라 할지라도 만사형통 하지는 않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예수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많은 무리를 이끌고 들판을 통과하는데 몹시 힘들고 먼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하여 모두들 자기가 들고 갈 만한 알맞은 돌멩이를 하나씩 준비하라 했다. 어떤 이는 좀 큰 것을, 어떤 사람은 알맞은 것을, 또는 작은 돌멩이를, 아예 돌멩이를 가지지 않은 자 등 각양각색이었다. 또는 길을 가는 도중 돌멩이를 버린 자도 있었다. 드디어 돌이 없는 모래밭을 통과하여 쉴 만한 곳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각자가 가지고 온 돌멩이를 앞에 내 놓으라 하신 후에 기도를 하시니 놀랍게도 그 돌멩이가 떡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작은 돌멩이를 가지고 온 자나 도중에 던져 버린 약삭빠른 자들은 얼마나 후회했을까! 지금은 좀 고생이 되지만 그 길이 정도라면 그저 묵묵히 그 길을 택하는 것이 바른 삶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그게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래 전 방영된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에 모 탤런트의 미국 유학시절 터키 친구를 찾기 위하여 프로 담당자가 미국까지 건너가 출연자가 다니던 학교를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학생의 주소를 물었으나 연방법을 어길 수 없어 알려 줄 수 없다하여 결국 그냥 되돌아 나와 다른 경로를 통하여 장본인을 찾아 만나는 내용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문화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은 일면을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가기만 하면 생활기록부의 성적은 물론 담임선생의 의견을 기록한 내용까지 전부 들추어서 온 천하에 밝히는데 말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적당주의가 통하지 않는 선진 미국사회의 높은 국민의식 수준을 피부로 느끼게 한 내용이었다. 정말 배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는 국민 민도가 낮아서 그럴까? 정이 많아서 그럴까? 참 편리하게 살고들 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대충대충이 가장 잘 통하는 사회가 우리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에는 밤눈 어두운 약삭빠른 고양이가 부지기수로 많다. 이 모두 사회를 위해서는 무용지물이건만……. 인생은 어떻게 보면 소꿉놀이 같은 삶이다. 운 좋고 힘 좋은 어린이는 양지바른 좋은 곳에 자리 잡아 편리하게 놀이를 하고, 꾀 없고 힘없으면 궁벽한 곳, 그늘진 곳, 비탈진 곳에 자리를 펴는가 하면 좋은 살림 다 빼앗기고 보기 흉한 깨진 그릇으로 세간 살림 장만하여 살아간다. 저택(?)을 마련하여 모든 것 풍족하게 흥청망청 살아가는 이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그것도 잠시, 어느덧 해가 서산마루에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나면 지금까지 가지고 놀던 모든 것을 다 던져 버리고 집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러고 보면 굳이 약빠르게 원칙을 어기면서 샛길로 갈 필요가 없었는데 그저 묵묵하게 비록 좀 멀고 험하다고 할지라도 바르고 곧은길로 걸어가는 것이 정도(正道)가 아닐까? 지금은 불편하더라도 인내로써 참아 내는 미덕의 결실을 생각해 본다. 피와 땀으로 맺어진 결실, 기쁨과 보람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이는 듯하지 않은가? 분명 샛길만이 최상의 길은 아닐 텐데. 아직도 너나없이 쉽고 편리한 길만 택하고들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