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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2025년 봄 특집- 김천의 벚꽃 명소와 함께 즐기는 역사 이야기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5.03.21 14:56 수정 2025.03.21 15:18

김천 벚꽃 대명사로 자리잡은 연화지
지역 최고령 벚나무가 있는 남산공원

교동 연화지

그 어느 해보다도 혹독했던 겨울이 가고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있다지만 흐르는 계절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유암화명(柳暗花明)”이란 옛말이 있다. “버들은 무성하고 꽃이 활짝 핀다”는 뜻으로 우리 조상들은 봄 경치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어두운 겨울을 봄꽃으로 밝힌다는 것이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세상을 빛나게 하는 봄꽃이야 수만 가지가 있다지만 그중 대명사는 벚꽃이라 할 것이다. 얼마나 급했으면 잎보다 먼저 꽃을 터트리는 벚꽃을 즐기는 벚구경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슴을 설레게 한다. 오죽하면 기상청에서조차 연례적으로 언론을 통해 지역별 벚꽃 개화 시기를 공표하고 있을 정도이다. 벚꽃은 제주도가 원산지라는 설이 있는데 이를 개량해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식재되기 시작해 국화(國花)가 됐고 일제강점기 한반도 전역에 식재됐다고 전해진다.
김천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곳곳에 벚나무를 심었는데 대표적인 장소가 교동 연화지 일대, 신사가 있었던 남산공원과 모암산, 직지사 오르는 도로변 등이다.
본지에서는 곧 다가올 벚꽃 개화기를 앞두고 김천의 봄을 밝혀줄 대표적인 벚꽃 명소 중에서 도심에서 즐길 수 있는 연화지와 남산공원 벚나무를 중심으로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편집자주>

김천의 옛 중심지 교동의 유서 깊은 명소 연화지
백년 이상 된 고목 벚나무 장관 벚꽃 명소로 우뚝


연화지(鳶譁池)는 김산향교와 함께 교동이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의 중심지였을 알 수 있게 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관광지이다. 원래 구화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두어 교동과 삼락동 일대 경작지에 물을 대던 관개용 저수지로 축조됐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사신과 내빈을 접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변을 정비하면서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내에 여러 개의 산봉우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큰 봉우리에 봉황대(鳳凰臺)라 불리는 정자라 있는데 사방 3간의 2층 다락으로 1700년 창건돼 이전된 정자로 처음에는 읍취헌(邑翠軒)이라 불렀다.

연화지의 이름과 읍취헌이 봉황대로 이름이 바뀌어 이 자리로 옮겨진 사연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연화지는 1707년부터 1711년까지 김산군수를 지낸 윤택(尹澤)이 부임 첫날 꿈에 관아 앞 저수지에서 솔개가 무리지어 노니다가 봉황으로 변해 날아오르는 꿈을 꾼 후 저수지 이름을 솔개연(鳶)자에 바뀔 화(譁)자를 써서 연화지(鳶譁池)라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 날아간 봉황새의 방향이 구화산 자락에 있었던 관아의 정자 읍취헌 쪽인지라 다락이름도 읍취헌에서 봉황대로 고쳤고 세월이 흐른1838년 군수 이능연(李能淵)이 지금의 자리인 연화지 중앙으로 옮겼다.
따라서 연화지는 솔개이고 봉황대는 날아오르는 봉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솔개가 봉황이 돼 날아오르는 윤택 군수의 꿈이 이능연 군수에 이르러 실현된 것이라고들 한다.

봉황대(사진)

많은 시인묵객들의 시에 연화지가 등장하는데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성종 때 시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임계(林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금릉 아름다운 땅, 맑은 물결이 일렁이네
물속에 비단비늘이 가득하고, 바람에 수양버들이 나부낀다.
푸른 것은 3만개의 연잎이요, 붉은 것은 열 길의 연꽃이네.
좋은 경치를 감상함은 내 분수가 아니니
떠나는 수레 타고 이곳을 지난다.

이 시에서도 수양버들이 등장하는데 원래 연화지 주변에는 수백년 된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버드나무를 베어내고 벚나무를 식재했다고 한다.
현재 연화지 주변으로 식재된 벚나무는 대부분 수령이 100년 이상된 고목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연화지에서는 매년 개화기가 되면 다양한 축제와 조명으로 장식해 야간 관람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주변에 음식점과 커피숖이 임주해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부상했다.

일제강점기 신사(神社) 단장용으로 식재된 벚나무
광복 후 남산공원으로 정비, 최고령 벚나무 자랑

남산공원

일제강점기 많은 일본인들이 한반도 전국 각지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각 지역마다 신사(神社)를 건립했다.
김천은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로서 일찍이 시장이 번성했는데 이를 간파한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해 일본인 거주자가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따라서 신사도 타 지역에 비해 빨리 건립됐는데 1915년 5월 김천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주동이 돼 김천태신궁봉찬회(金泉太神宮奉讚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남산에 신사건립 사업을 시작해 1916년 준공됐다. 이때부터 신사 주변에 벚나무를 식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김천신사는 처음에 작은 규모의 간이신사로 출발해 1924년 경내를 확장하고 신전을 단장하는 한편 많은 벚나무를 식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김천신사(현 남산공원)

또 신사로 올라가는 돌계단과 석등, 돌다리(남산교)를 설치하는 등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을 벌였는데 1928년 7월18일 정식 신사로 승격한 후 일본의 국경일이나 2차 대전 선전포고일 등 각종 기념일마다 학생과 시민들을 동원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광복 후 김천신사의 모든 건물과 구조물은 철거되고 현재는 석등 5기와 계단, 고목 벚나무 몇 그루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김천신사는 일제감점기에 우리 조상들이 나라 잃은 설움을 감내하며 내선일체를 강요받았던 아픈 역사의 상징인 것이다.
봄이 되면 남산공원을 환하게 밝히는 고목 벚나무는 일제강점기로부터 광복, 오늘에 이르기까지 김천의 아픔과 환희, 발전상을 백년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김천문화원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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