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내 곳곳에는 국보 갈항사지 삼층석탑의 김천 이전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물결을 이뤄 타향살이를 끝내고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와야한다는 시민들의 염원이 하나로 모아지고 있다. 차제에 갈항사와 갈항사지 삼층석탑에 얽힌 이야기를 기획특집으로 다룸을 통해 시민들과 출향인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편집자주>
△갈항사지 삼층석탑
김천을 상징하는 말 중에 삼산이수(三山二水)라는 말이 있다. 그 삼산에 금오산이 있다.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저녁노을 속으로 금빛 까마귀가 날아가는 형상을 보고 쇠 금(金), 까마귀 오(烏)를 따서 금오산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할만큼 명산으로 이름이 났고 그래서 산 곳곳에 많은 절이 세워졌다.
지금은 터만 남은 갈항사는 남면 오봉리 갈항마을 뒤 금오산 서편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옛날 이곳에 칡이 많이 서식해 칡 갈(葛)자에 크다, 많다, 또는 장소를 뜻하는 목항(項)자를 써서 갈항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옛날 갈항사 일주문 앞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마을 이름도 갈항이라 했다는 갈항마을로부터 왼편 좁은 길을 따라 500미터 남짓 오르면 작은 전각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다랑이 밭으로 변한 폐사지 내 보호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가여래좌상이 허망한 절터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천년고찰 갈항사
갈항사는 당나라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돌아온 승전대사(勝詮大師)가 692년(효소왕 1) 창건했다.
‘삼국유사’에도 갈항사와 관련된 기록이 등장한다.
“승전이 개령군에 절을 짓고 돌멩이 80여개를 모아놓고 화엄경을 강연했으며 그 돌이 지금도 전하는데 영험한 이적을 보였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 사료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사세를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폐사되기 전에는 금오산 약사암과 북삼의 굴암사 등을 산내암자로 거느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갈항사지에서 바라본 금오산
절터를 지키는 두 기의 불상
폐사지 중앙의 금당 자리에 조성된 보호각 내에는 보물 석조석가여래좌상이 봉안돼 있는데 창건 당시에 조성된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의 불상이다.
높이 1.5m의 크기로 비슷한 시대에 조성된 불상들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 이목구비가 사실적으로 표현된 수작으로 꼽힌다.
△보물 갈항사지 석가여래좌상
특히 잘록한 허리곡선을 따라 신체에 밀착된 부드러운 옷의 윤곽은 천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삼각형의 코는 아들 낳기를 소원하는 숱한 아낙들의 손때를 타 검게 물들어있어 더욱 인간적으로 보인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석가여래좌상은 폐사된 뒤 일제강점기 초까지 땅속에 묻혀 있다가 주민들이 발굴해 초가집을 지어 모셔왔으며 1978년에야 지금의 보호각을 세웠다고 한다.
보호각 오른쪽에는 비로자나불상이 금오산을 등지고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두상은 근년에 다시 붙인 듯 어딘지 어색하지만 비로자나불 특유의 지권인을 한 모습이 당당하다.
△갈항사지 비로자나불좌상
갈항사를 창건한 승전대사가 화엄경을 설파했던 화엄종 고승인 점을 감안할 때 갈항사의 금당에 모셔졌던 원래 주불은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신라 38대 원성왕이 화엄종 교단의 지원으로 즉위할 수 있었고 불교 교단을 장악하기 위해 화엄종을 적극 지원했다는 것도 이같은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폐사지 곳곳에는 우물과 건물지 축대, 초석, 기와편이 산재해있어 옛 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갈항사지 우물
김천을 떠난 김천의 국보 갈항사지 삼층석탑
신라의 삼국통일은 석탑의 형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7세기 감은사, 고선사 삼층석탑을 시작으로 이 시기에 조성된 석탑들이 통일왕조의 권위와 위용을 상징하듯 안정적이면서도 주위를 압도하는 웅장함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초층 탑신석 상단 중앙까지는 밑변이 긴 삼각형 구도로 안정감을 더했고 층간 높이와 지붕의 비례를 일정하게 체감시켜 시각적인 효과를 돋보이게 했다.
8세기 중엽에 이르러 하부의 정삼각형 구도와 절묘한 체감율이 적용된 석가탑(751년)을 필두로 아름다운 석탑이 등장하는데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갈항사 탑 또한 비례가 절묘한 탑으로 알려지고 있다.
갈항사지 석가여래좌상 보호각 앞 밭에는 원래 동서로 석탑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양쪽에 서 있다.
국보 갈항사지 삼층석탑이 서 있던 자리를 알려주는 흔적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문화재연구를 핑계로 수많은 일본인 사학자들이 한반도로 건너왔다.
1916년 6월, 김천지역을 돌아보던 일본인 역사학자들은 탑의 정확한 조성시기가 몸돌에 새겨져 있는 이 탑의 가치를 간파하고 같은 해 2월에 있었던 도굴사건과 보호를 빌미로 서울로 옮겨 경복궁 내의 총독부박물관에 보관했다.
△이전되기 이전의 갈항사지 삼층석탑
“우리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일제 때 일본사람들이 와서 수레가 올라갈 길을 낸다며 마을 뒷산을 헤집더라는 기라. 갈항사 탑이 도굴범들 때문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탑을 수리하는 줄 알았으나 갑자기 탑을 해체하디만 수레에 싣고는 부상역으로 가서 기차에 옮겨 어디론가 갔다는구만”
1998년, 마을의 전설을 조사하기 위해 갈항마을을 찾았을 때 한 어르신으로부터 들은 갈항사 탑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처음 부설됐을 때는 현재의 김천역, 아포역, 구미역, 약목역으로 연결되는 노선과 달리 김천역에서 부상역, 약목역 노선이었기 때문에 갈항마을에서 가까운 부상역으로 해체한 탑을 옮긴 후 기차에 싣고 서울로 떠났다는 것이다.
광복 직전인 1945년에는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인천부두에까지 기차로 실어갔다가 실패해 부둣가에 방치돼 있던 것을 다시 경복궁으로 옮겨 1962년 국보 제99호로 지정됐다.
일본인들조차 탐을 냈던 갈항사 탑의 역사적 가치는 동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글씨(명문) 때문이다.
△갈항사 동탑 명문
우리나라 탑 중에서 조성연대를 비롯한 건립경위가 밝혀진 유일한 사례라는 것이다.
동탑 기단부에는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娚者靈妙寺言寂在思旅○○姉者照文皇太后君嬭在旅○○妹者敬信大王嬭在也”
해석하면 “두 탑은 천보17년(758년) 경신대왕의 어머니 소문황태후와 여동생, 오빠 언적 등 3인의 발원으로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경신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이름이며 소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를 말한다.
시호인 원성왕이 아닌 경신이란 이름을 사용한 점을 보아 원성왕의 재위기인 785년에서 798년 사이에 명문을 새긴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김경신이 왕이 된 후 그의 외척들이 집안의 원찰이었던 갈항사에 등극을 기념하는 추가불사를 진행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이것은 탑 전면에서 볼 수 있는 일정한 간격의 못구멍을 통해서도 추정할 수 있는데 이같은 사례도 예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경우로 갈항사 탑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 시기 석탑의 표면에 못구멍을 뚫는 사례는 옥계석 모서리에 풍탁을 달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않는 기법이다.
추정하기에 이 구멍은 탑의 표면에 장엄용 금동판을 부착하면서 고정하는 못을 박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금오산에서 솟아오른 태양이 갈항사 쌍탑을 비칠 때의 화려한 장관은 왕실의 원찰인 갈항사의 위엄을 한껏 높였을 것이다.
또 탑의 초층 탑신부의 중앙이 거칠게 갈아낸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석탑 조성당시에 돌출된 사천왕상이나 보살상 부조가 새겨져 있었는데 금동판을 부착하기에 어려움이 있자 떼어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탑은 4.3M, 서탑은 4M로 동탑은 옥계석이 없고 양탑 모두 상륜부가 사라지고 없다.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야 할 갈항사지 삼층석탑
문화재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가치와 성품을 가장 함축적으로 담아낸 역사의 그릇이라고 한다. 1,000여년 전 김천인들의 마음이 오롯이 담겼을 갈항사와 폐사된 절터를 지키다 홀연히 사라진 삼층석탑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타의에 의해 강요된 희생물인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돌아와야 했을 갈항사지삼층석탑, 늦었지만 타향살이의 설움을 끝내고 이제 고향 김천으로 돌아오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해본다
<김천문화원 송기동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