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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3·1운동 105주년 특집-김천의 독립운동가 김태연(金泰淵 일명 김단야)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4.03.06 15:25 수정 2024.03.08 08:36

개령면 동부리 출신 자랑스런 독립운동가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 전개
고인의 공적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일제로부터 국권을 강탈당한 이 땅의 백성들이 전국적으로 궐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1919년 3월 1일의 만세소리가 지축을 울렸던 3·1운동 105주년을 맞이했다. 만세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과 살육에 미수에 거치기는 했으나 이 사건은 백성들에게 독립에 대한 불씨를 지피는 계기로 작동했고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의 매개체가 돼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전국적으로 무수한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는데 우리 고장 김천에서도 많은 우국지사들이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독립운동에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사회주의 계열이라 해서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활동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 속에 소외돼 그 활약상이 얄려지지 못했던 안타까운 그 이름, 김태연(김단야)를 올해 3·1절 특집으로 다루고자 한다. 김천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뒤늦게 공적을 알리게 됨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고인의 독립운동과 희생이 오늘날 이 나라와 우리 고장이 번영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됐음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주>

김단야
김단야
김태연(金泰淵 1900~1938)은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68번지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김녕김씨 김종원과 동래정씨 사이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국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김단야(金丹冶), 김주(金柱), 김추성(金秋星)이라고도 했다.
1908년부터 김천의 개진학교, 진명학교, 영진학교를 거쳐 1915년 기독교계 학교인 대구의 계성학교에 진학했으나 1916년 11월 일제의 조선지배를 정당시하는 미국인 교장에 반대해 동맹휴학을 주동하다가 퇴학당했다. 1917년 일본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6개월간 배운 뒤 돌아와 배재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는 한편 지하유인물 ‘반도의 목탁’을 발행해 배포하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 뒤 고향인 개령면에서 은창서(殷昌瑞)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다가 일경에 체포돼 김천법원에서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3·1운동 후인 1919년 8월 경남 거창군 오형선(吳亨善)의 집에서 오형선, 이덕생, 고운서, 주남고 등과 함께 비밀결사 적성단(赤星團)을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 및 의용병 모집에 대해 논의했다. 이들은 만주에서 활동하는 군정서(軍政署)에 독립군을 파견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김태연은 신도출(愼道出)이 제공한 군자금을 가지고 주남수(朱南守), 이사술(李四述), 이성년(李聖年), 백기주(白基周) 등 4명의 의용병을 선발해 만주 군정서로 파견했다. 만주에서 돌아온 그는 동년 12월 다시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0년 2월 저장성 항저우의 배정학교에 입학해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는 한편 상해의 사회주의연구소에 출입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가 조직될 때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을 맡고 고려공산당원이 됐다. 1922년 1월에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국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같은 해 4월 김만겸(金萬謙), 여운형(呂運亨), 안병찬(安秉璨) 등이 조직한에 가입했으며 박헌영(朴憲永), 임원근(林元根) 등과 함께 사회주의운동의 국내 활동을 목적으로 국내 잠입 기회를 엿보던 중 4월 3일 김태연이 먼저 신의주에 잠입했다가 일경에 체포돼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4년 1월 19일 출옥한 그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박헌영, 임원근 등과 함께 사회주의 단체인 세칭 화요파(火曜波)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신흥청년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결성될 때 핵심인물로 참가했다. 이때 그는 고려공산청년회의 강령 규약을 작성했고 전형위원 및 집행위원, 연락부 책임을 맡으며 주로 코민테른, 해외 조직과의 연락을 담당하는 대외 창구의 역할을 맡았다.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 조직이 발각되자 김찬(金燦) 등과 함께 상해로 망명해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를 설치하고 국제공산당과 국내 공산당을 연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코민테른의 동양혁명후원회의 후원자금, 유학생의 갹출금 등 다양한 경로로 모집된 자금을 국내의 고려공산청년회에 전달하면서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활성화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조선공산당 기관지 ‘불꽃’의 주필을 맡기도 했다.
1926년 봄 국내에서 대규모의 대중시위를 계획하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동년 4월 26일 융희황제(순종)의 승하 소식을 접하면서 3·1운동 때와 같은 전국적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그것이 6·10만세운동의 태동이었다. 이때 김태연은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운동의 선봉에 서야 된다는 취지로 6·10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했다. 그와 김찬은 국내에서 6·10만세운동을 책임질 인물로 권오설(權五卨)을 선정하고 5월 초부터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때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격문과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만주 단동과 신의주로 가서 권오설을 만나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협의했다.
또한 그는 김찬과 함께 만세시위 때 사용할 장문의 격문인 ‘곡복(哭服)하는 민중에게 격한다’를 지어 상해 삼일인쇄소에서 5,000부 정도를 인쇄한 뒤 국내에 발송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국제공산당 원동위원 등으로 활약하면서 조선공산당의 창당과 재건을 주도하며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확산을 통한 독립을 위해 소련·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활동했다.
1930년 1월 서울 아현동 고명자의 집에서 공산주의자 회합을 하다가 발각되자 소련으로 망명했다. 1937년 11월 일제밀정이라는 밀고로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돼 1938년 2월 13일 반혁명폭동과 반혁명 테러활동 단체의 지도자로 판결받고 사형을 당했다. 2005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태연의 어린 시절부터 순국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어린시절
1906~ 서당에서 만2년 한문 공부를 하다가 기독교에 입문해 세례를 받았다.
1908~ 개령면 개진학교(현 개령초등학교) 입학. 진명학교를 거쳐 영진학교에서 4년간 수학 후 졸업.

김태연 생가 터
김태연 생가 터
▲김태현 생가터(개령면 동부리 69번지)


개령교회
개령교회
▲현재의 개령교회
손녀인 김현숙씨는 김단야의 집이 영진학교였고 교회였다고 기억하며 김단야의 아버지 김종원은 본래 한약방을 경영했으나 아들의 독립운동 때문에 일제에 면허증을 박탈당했다고 증언했다.

민족의식에 눈뜨다
1915년 4월 대구 계성학교 고등보통학과 입학.
1916년 12월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시하는 미국인 교장과 일본인 교사를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이끌다 퇴학당함.
1917년 2월 일본 동경 正則(세이소꾸영어학교) 수학. 9월 서울로 돌아와 배재학교 입학. 1919년 졸업을 앞두고 반일학생서클에 가입, 지하유인물 ‘반도의 목탁’ 발간에 참여했다.
개령에서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1919년 3월 24일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개령면 동부동에서 허철·김종수·최영돈 등과 만세 시위를 하기로 합의. 개령공립보통학교 졸업식, 학부모 은창서집 혼인잔치로 사람이 모이자 김단야가 일장연설을 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이로 인해 태형 90을 언도받았다.
일제 관헌 자료에서는 “김태연은 야소교 신자로서 치열한 배일사상을 가졌고 항상 조선이 일본의 치하에 있음을 분개하고 있다”고 쓰여있다.
(독립운동사 자료집 5, 김도형 인물연구에서 재인용)

삼일운동 판결문
삼일운동 판결문
▲김태연 3·1운동 판결문(1919년 4월 15일 김천지방법원)

만세운동 이후 8월 거창 오형선 집에서 비밀결사 적성단을 조직, 독립군을 모집해 만주군정서에 파견하고 군자금을 전달했다.
의성지방에 독립촉구 삐라 살포.
신한별보라는 지하신문을 배부하도록 시켰다가 발각돼 1921년 관련자 여러 사람이 체포당함.
1919년 12월 상해로 망명했다.

민족해방을 위해 사회주의자가 되다
1921년 3월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여, 집행위원이 돼 기관지 ‘벌거숭이’ 편집인으로 일했다.
1922년 1월 21일~2월 2일 극동인민대표회의와 극동청년대회에 고려공산청년회 대표로 참석했다.
1922년 2월 20일 각국의 대표 17명과 함께 레닌회견에 참석했고 식민지에서의 민족 독립의 문제가 선결과제임을 인식, 사회주의 사상을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국내 활동을 위해 귀국 도중 신의주에서 체포돼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았다.(평양형무소)
1924년 1월 출옥한 후 서울로 가서 동아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1924년 9월부터 1년여간 총 88건의 기사를 총독부에 압수당했다.
화요회에 가입해 활동하는 한편 ‘레닌회견인상기’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신흥청년, 불꽃(화요회 기관지 성격) 발행, 전국 각 지방 순회강연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는 사업에도 착수했다.
1925년 4월 18일 고려공산청년회 발기인 대회 강령작성과 전형위원 및 집행위원이 되어 활발한 조직활동을 했다.
코민테른(공산주의 국제연합)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들과 연락 담당, 권오설과 함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보낼 학생 인선작업을 담당했다.
1925년 말 신의주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원에 대한 일대 검거로 주요 간부들과 당원들이 체포됐으며 11월 29일 박헌영과 주세죽이 체포됐다. 같은 해 12월 검거를 피해 상해로 2차 망명을 했다.

6·10 만세운동
1926년 4월 25일 순종의 사망 소식을 듣고 김단야는 조선공산당 간부들과 함께 전 민족이 참여하는 독립만세 운동을 기획했다.
김단야는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의 대부분은 동시에 민족주의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운동의 전위로 활동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식민지에서는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며 정치해방이 곧 경제해방”이라는 이론에 바탕해 민족 사이의 모순을 먼저 해결해야 하며 그 해결책은 바로 민족혁명 곧 독립이라는 정신으로 거족적인 민족운동을 벌이고자 했다.
국내에 남아있던 권오설 등과 연락을 취해 순종의 장례일에 대규모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김단야를 만난 권오설은 지도부인 6·10 투쟁특별위원회의 책임을 맡고 여러 단체에 협력을 구해 천도교, 조선공산당, 학생층 등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도록 했다.
김단야는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선전격문 작성을 맡았으며 김단야의 자금은 국내 활동가들이 만세시위를 준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6월 7일 김단야가 작성한 격문 ‘곡복(哭服)하는 민중에게 격(檄)한다. -창덕궁 주인 서거에 제(즈음)하여’ ‘전 조선 민중의 단결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자’가 발각돼 압수당했고 권오설이 체포돼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으나 6월 10일 장례 행렬에서 이선호(중앙고등보통학교학생)가 만세를 부르는 것이 신호탄이 돼 학생들이 서울 곳곳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6·10만세운동이 좌절되고 1926년 8월 국제레닌학교(모스크바)에 입학했다.
가을에는 공산대학 재학생들에게서 혁명자 후원자금을 거둬 조선혁명후원회에 송금하고 1927년 봄에는 이 사업을 조직적으로 하기 위해 조선공산당혁명 희생자 후원회를 결성했다.

국제레닌학교 시절의 김태연
국제레닌학교 시절의 김태연
▲국제레닌학교 시절의 김태연.
호찌민·주은래·주세죽·박헌영이 함께 있다.(원내가 김태연)

1928년대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승인취소와 새로운 방침에 따라 조선공산당 재건과 재조직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
1929년 7월 모스크바를 떠나 조선으로 재입국하여 장래 혁명투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노동청년 중 유망자를 선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시키기로 결의했다.
1931년 3월 상해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창간, 콤뮤니스트 책임편집위원이 됐다.
1932년 1월 상해사변, 4월 윤봉길 의거 등을 계기로 일제의 조선인 운동자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상해 상황이 열악해졌다.
5월 말 격문·팜플렛 살포가 단서가 되어 국내 검거가 시작돼 조선에 파견된 김형선이 상해로 돌아왔다.
1933년 5월 김단야 대신 박헌영이 상해에서 체포됐다.
노선을 수정해 국내에서 좌익통일전선 결성에 관심을 가지고 이재유 그룹과 연계를 모색했으나 실패하고 박헌영·김형선이 체포되자 국내 조직은 거의 파괴됐다.
정태희를 국내에 파견해 국내 조직 재건을 꾀했으나 그도 돌아오던 길에 체포됐다.
1934년 상해에서 재소련 조선인을 위해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1933), ‘어떻게 콜호즈원은 유족하게 되는가’ 등의 저작활동을 했다. 이후 모스크바로 건너가 동방노력자 공산대학 조선민족부 책임자가 돼 유학생을 지도했다.

억울한 죽음과 명예 회복
1936년 8월 모스크바 외국인노동자 출판부 한국지부 편집장 직위에서 면직됐고 스탈린 정권은 대숙청을 시작했다. 김단야도 그 희생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1937년 12월 반혁명적 간첩테러조직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김단야는 당시 자신을 변호하는 필사적인 노력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1938년 2월 13일 군사법정에서 총살형과 재산몰수형을 선고받고 당일 사형이 집행됐다.

손녀가 되찾은 할아버지의 명예
2001년 러시아 대검찰청은 그의 명예를 복권시켰다.
손녀 김현숙씨가 자료를 모아 노력한 끝에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한 축을 지탱했던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은 조국 광복의 큰 밑거름이 됐다. 그는 무엇을 위해 그 고난의 길을 그리 쉼 없이 갔던 것일까? 식민의 아들로 태어나 1916년 시작된 제국주의를 향한 그의 저항은 그친 적이 없었다. 그의 꿈은 민족과 계급의 해방이었다. 민족이나 계급 사이에 차별과 억압이 없는 사회,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가 그가 온 생을 바쳐 이루고자 한 이상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그 신념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었고 일생 그 길을 이끌었다.
이준식의 ‘2005년에 다시 기억하는 혁명가 김단야의 삶’에서 인용

훈장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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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
훈장
 
송기동(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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