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한여름의 열기가 계속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풀벌레 울음이 드높아가고 있다. 고향 집에 들렀다가 한낮에 입을 연 귀뚜라미 노랫소리에 나도 모르게 문밖을 나섰다.
가을은 소리 없이 다가와 우리 눈앞에 황금벌판을 펼쳐 놓고 알곡이 익어가는 소리를 들려준다. 이렇게 골짜기마다 들녘마다 어김없이 제몫을 다해 생의 결실의 잔치를 벌이는 모습이 거저 황홀하기만 하다.
청명한 하늘 아래 탐스럽게 익어가는 붉은 사과는 한낮의 따가운 열기로 속살을 더욱 단단하게 익혀가고 땅콩과 고구마는 땅속에서 이제 곳간으로 이사할 채비를 서두르며 풍성한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부모님 산소를 모신 고향마을 앞산의 밤나무 옆을 지나가니 툭, 알밤이 추락하면서 자기의 존재를 알리는 파열음을 던진다. 여기저기 봄에 뿌려진 곡식들이 저마다 알차게 여물어 하나의 구김살도 없이 대견스럽게 계절의 광채를 던져주는 튼실한 모습에 그저 고마움을 표할 뿐이다. 특히나 알뜰살뜰 보살핌도 없었는데 스스로 그렇게 자라준 밤알들을 주어면서 갑자기 조복거인(造福擧人 자기 복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뜻)이란 말이 떠오른다. 올 여름은 예년에 볼 수 없을 만큼 무더웠고 가을장마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채소들이 견뎌내지 못하고 그냥 녹아내리기도 했다.
쉽게 가을이 올 것 같지 않더니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오듯 결국 가을은 오고야 말았다. 빛나는 생명들은 무서운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고 저마다 승리의 깃발을 들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고운 빛깔로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을 들녘에는 우리 가슴을 훈훈하게 풀어주는 이름 모를 풀꽃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알차게 여무는 곡식들을 보면 농부의 피땀 흘린 수고에 고개가 숙여지고 충만하게 가꿔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이즈음 외진 들길에 피어 있는 야생초를 대하면서 속세에 물들지 않은 청순한 자태를 보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우리네가 부끄럽기만 하다.
자연에 결실이 있듯이 인생에도 결실이 있다. 그래서 자식을 기르는 일을 ‘자식농사’라고들 한다. 우리 가정에도 비록 크진 않지만 쏠쏠한 결실을 맞은 금년이다. 캐나다로 시집간 딸애는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하여 시민권을 얻었고 사위는 밴쿠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게 되었으며 손주녀석은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며느리는 김천의료원에 간호사로 복직을 하는 등 작지만 이런 결실 하나하나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초석을 놓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그렇다. 계절적 결실도 풍요롭지만 인생의 결실 또한 여기에 못지않게 한몫을 한다. 어떻게 보면 결실이란 게 또 다른 면으로는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결실 뒤에는 또 새로운 시작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과 결실이 끊임없이 순환 반복되고 있다.
결실은 등위를 매기기 곤란하다. 우후죽순처럼 빨리 크는 나무가 있고 평생을 자라도 다 크지 않는 나무가 있듯이 인생사에도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있고 삶의 이모저모를 폭넓게 체험하면서 뒤늦게 결실을 맺는 대기만성형 인생도 있다. 결실에 등위나 크기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작으면 어떻고 좀 늦으면 어떠랴? 그저 나에게 주어진 삶을 알차게 가꿔 수확물을 기쁘게 소쿠리에 담는 일이면 훌륭한 결실이 아니겠는가? 목적지에 언제 도착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만큼의 최선을 다한 결실인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이 가을, 들녘에 서서 무엇을 왈가왈부하여 다만 자연에서 들려오는 결실의 신비로움을 바라보면서 여기에 인생의 결실을 보듬어 얹어보는 것으로 이 가을을 만끽하면 그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