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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제77주년 광복절 특집-일제강점기 천인이 펼친 독립운동의 역사<상>

권숙월 기자 입력 2022.08.25 15:50 수정 2022.08.25 15:51

김천은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해 역사적으로 잦은 외침
대한제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치열한 국권회복 노력
55명의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 배출한 충열의 고장

↑↑ 항일독립운동

김천은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을 포함한 독립운동가 55명을 배출한 호국의 고장이라 자부할만하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살신성인한 자랑스러운 김천인은 다음과 같다.
강두문(姜斗文), 강익형(姜益亨), 권태석(權泰錫), 김교훈(金敎勳), 김남수(金南洙), 김복출(金卜出), 김복안(金鳳安), 김삼출(金三出), 김상준(金尙俊), 김수길(金壽吉), 김술이(金述伊), 김원배(金元培), 김일조(金壹兆), 김임천(金任天), 김재위(金在緯), 김타관(金他官), 김태연(金泰淵), 도말영(都末永), 류철야(柳哲也), 문학이(文學伊), 박갑천(朴甲天), 박계수(朴季壽), 박근성(朴根成), 박내영(朴來英), 박만준(朴萬俊), 박제원(朴齊元), 박태안(朴泰安), 석기만(石基萬), 신현식(申鉉式), 송준필(宋俊弼), 여중룡(呂中龍), 여채룡(呂彩龍), 유진성(兪鎭成), 이건석(李建奭),이경균(李璟均), 이군명(李君明), 이명균(李明均), 이병구(李炳九), 이석균(李○均), 이승욱(李陞旭), 임경갑(林敬甲), 임춘일(林春一), 장삼조(張三兆), 정만수(鄭萬洙), 정환진(鄭晥鎭), 최경연(崔敬淵), 최무길(崔武吉), 최상원(崔相元), 최용수(崔龍洙), 최응수(崔應洙), 최익길(崔益吉), 편강렬(片康烈), 한명수(韓明洙), 허철(許喆), 황도석(黃道石) 등이다.
광복 제77주년을 맞아 우리 고장이 외세의 침탈이 잦았던 역사적 근원으로부터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펼쳐진 국권회복과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친 김천인들의 희생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외세침탈이 빈번했던 김천의 지리적 배경과 저항정신
↑↑ 1910년경 촬영한 김천 전경

한반도 남부의 중앙에 위치한 김천은 예부터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의 접경에 위치한 지리적 입지로 위해 일찍이 교통이 발달했다.
교통으로 대표되는 지리적인 이점은 필연적으로 팽창하는 세력간 충돌점이 됐고 삼한시대에는 마한, 진한, 변한,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 가야간의 크고 작은 격전장이 됐던 것이다.

특히 김천지역에 자리 잡은 삼한시대 변한계 소국 감문국(甘文國)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斯盧國)과의 전쟁과정에서 멸망했다. 고려시대에는 무인정권에 환멸을 느낀 대문장가 임춘(林椿)이 김천으로 낙향해 가전체 문학의 꽃을 피웠고 여말선초에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부르짖으며 많은 선비들이 벼슬을 버리고 김천으로 낙향해 은거하는 등 뿌리 깊은 반골(反骨)의 기상이 모인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과 지부심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빛을 발했으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인좌의 난, 한말의병운동이 그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사학설립과 언론, 청년, 여성운동을 통한 민중계몽활동과 종교 및 정치결사단체활동, 만세시위운동과 무력항쟁 등 다방면에서 치열한 국권회복활동을 전개해 김천지방이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제국기의 국권회복운동
의병무력항쟁
고종 31년(1894년) 일본은 개화정책의 전제라면서 한국 정부의 내정을 깊숙이 간섭하면서 이른바 갑오경장을 강요하게 되고 눈엣가시인 청국을 막강한 군사력으로 몰아낸 후 1895년 8월 친청(親淸)의 근원을 뽑으려고 국내에 자객을 침투시켜 국모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진상이 밝혀지지 않다가 11월 단발령이 전국에 내려지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혀졌다.
민비 시해도 일본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단발령도 일본의 강요로 인해 한국 정부에서 불가피하게 내렸다 해서 백성들은 대한제국 정부의 무력함에 오히려 분개했다.

단발령은 당시 우리 사회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상투차림의 장발은 수천년 내려온 버릴 수 없는 인습으로서 성리학적 윤리관에 젖어 있는 국민으로서는 반도덕적인 정책으로 받아들여져 단발령에 대한 저항은 대단했다.
국모 시해보다도 오히려 단발령에 대해 직접적인 저항의 깊이와 폭이 컸다.
“왜놈들이 국모를 시해하고 단발령까지 내렸다”는 격문이 창의기병으로 직결됐던 것이다. 이때부터 국내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고 일본 공사관을 비롯한 일본세력을 축출해 자주정부로서의 기능을 회복하려고 잇따른 상소에도 반응이 없자 유림을 중심으로 거병해 무력으로 일본을 축출하려는 운동이 봇물처럼 일어났다.

김산장의군(金山杖義軍)
1894년 봄부터 김천 지방을 휩쓸었던 동학 농민군은 폐정 개혁을 내걸고 지금까지 양반들에게 당해온 반상(班常)의 구별을 없애려고 신분제도 폐지와 양반 지주들에게 농토를 독점당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해 온 경제적 불균형을 타개키 위해 투쟁키로 한 일종의 혁명이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에 동감해 일부 양반 지주계층에서도 동학에 입도하여 농민군을 지휘하는 접주가 적지 않았다.
이때 동학을 진압한다는 핑계로 일본군이 들어와 각지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군은 투쟁 목표가 양반 지주에서 일본군으로 바뀌었는데 농민군은 훈련된 일본군과 적대할 수 없었고 1895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농민군은 진압당하고 말았다.
농민군이 진압되고 난 다음 양반계층의 유림에서는 일본군에 대한 항쟁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1895년 8월 민비 시해사건이 있었고 11월 단발령이 내려졌다. 단발령은 유림들을 자극해 일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운동의 촉발로 작용했다.
여중룡(呂中龍)은 그의 저서 ‘남은유집(南隱遺集)’에서 “단발령은 개화의 미명아래 매국노가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1월 11일 이상설·최창섭이 호응하고 향교에 함께 모여 16개 조항의 여러 규칙을 만들고 김산군수의 협력을 요청한바 군수는 관민의 공사는 불가하다 해서 지사들만이 거사를 서둘렀다.
1월 22일 지사들이 향교에 모여 관민의 추앙을 받고 있는 정운채를 의병군의 통수자로 추대키로 하고 김기락을 보내 취임 의향을 묻기로 했다. 김기락이 돌아오기 전 유도섭이란 자가 찾아와 조동석·이기찬 ·허위·강심형·양재안·이기하 제씨가 상주에서 오래 전부터 창의하려고 여러 차례 회합했으나 때를 못 만나 지금까지 성사치 못하고 지금 김천에 유숙하면서 40~50명의 포정을 확보하고 포수 수백 명을 거느리고서는 개령의 허위경과 함께 김산 무기고에서 무기를 거두어 황간으로 나아가 군기를 세워 진을 치면 영동·옥천에서도 공동 동참하기로 약속이 돼 있으니 함께 협력해 거사하자고 했다.

그들의 실정을 살펴보니 군자금이 마련되지 않았고 개령과 선산에서 온다던 포수도 오지 않아 거사를 못할 것으로 여겨 주저하고 있는데 남면에서 강일선·강태목·이병구가 와서 상주 의사들과 옥신각신하다가 나라를 구하려는 대사에 지역간 주객을 다툴 수는 없다고 했다.“
이기찬 의병장이 단상에 올라 행군규칙을 설명하고 ‘김산장의대장’이라 크게 쓴 대장기를 세우면서 김산의병군이 창설됐다.

↑↑ 김산향교

향교에서 창군한 의병군은 읍내 관아에 있는 장교청으로 진영을 이동하고 장병은 각 관청에 분산 숙식했다. 군비는 김산군의 세무관으로 있던 여영근이 2천량을 마련해 우선 충당하고 김산군의 하리 백채기를 설득해 김산군 관아 무기고에서 군기를 거두어 김천역으로 이동한 다음 오후 농소 노곡으로 다시 옮겼다가 해질 무렵 지례로 행군해 그곳에서 노숙했다.
이른 아침 사방 문에 창의를 호소하는 격문을 붙이고 지례현감 이주필을 수방장으로 추천했으나 불응하고 대신 관포군을 의병군에 보내니 모군에 응하는 자가 많아져 군세를 떨쳤으나 운량도감이 군량 조달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 의병들이 굶주리기도 했다.
이때 선산에 사는 여중룡의 친척이 급히 달려와 관찰사 이중하가 관병 수백을 보내 지금 김천에 와있는데 곧 지례에 당도할 것이란 전갈을 해 왔다.

의병군 간부들이 군병을 모아 놓고 “우리 의병군은 아직 훈련을 못 받았으므로 관군을 무찌르고자 하나 싸울 수가 없으니 반드시 흩어질 것이다. 부득이 각자 흩어져 숨어 있다가 후일을 기약하자”며 껴안고 울었다.
의병장 이기찬을 비롯해 간부 여영소·이상설·최동은 등과 여중룡은 황간의 신씨 집에 가보니 마을은 비어 있었다.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니 대구 관군일이 궁금해 구성으로 사람을 보내 수소문해보니 한 사람도 못 잡고 각 수령에게 체포령을 내렸다고 한다.

↑↑ 홍심동 이용직 판서 집터

십수 일이 지나 모두 뜻을 잃지 않고 다시 모여 군량 모집을 광고하자 황간 읍민이 많이 호응해 군세가 자못 떨쳤다. 양산의 유인목 의사로부터 통문이 왔는데 그곳 수령도 거사할 뜻이 있으나 군병을 모을 수가 없어 초계·삼가에 가보았지만 여의치 못해 진주로 노응규를 찾았으나 군병을 빌리지 못한 채 거창에서 포수 70여명을 얻었을 뿐이라 했다.
또 양산의 이현우 등 모두 5명을 지례로 이동케 했던바 지례현감이 포수 5명을 주어 사기가 높으니 김산진도 합세해 동참함이 어떠냐고 청해 이를 수락하고 황간 상촌으로 진영을 이동했다가 구성면 마산리에 이르렀을 때 유인목이 단기로 달려왔다.

여중룡이 “어제 받은 통문에 득세라 하더니 밤사이 어인 일이냐” 하고 묻자 그는 “지례관아의 관리들이 포수를 감언이설로 유인해 대구 관군에게 몰살될 터이니 도주하라”해서 흩어졌다는 것이다.
김산장의군이 구성면으로 이동하니 지례현의 관리들이 방해했으나 현감은 군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 등 후대했다. 군진을 홍심동(부항면 대야리)으로 옮겨 진용을 정비하고 이주필을 부의병장으로 청했으나 수락하지 않았고 이성백을 우익장에, 양산의 유인목을 행도집례에, 조석영을 운량도감에 배치하고 다음 날 운량관 이현삼이 찾아와 군량미 조달을 약속했다. 홍심동은 오지인데 전 판서 이용직이 이곳에 낙향, 정착해 수십 칸의 저택을 짓고 살면서 식량이 궁핍한 때에도 벼 80석을 곡창에 쌓아 놓고 있었다.

서찰을 보내 군량을 청했더니 쾌히 80석을 보내주므로 고맙기 헤아릴 수 없었다. 돈으로 치면 수천 량이 되는 것이다
이틀이 지나 들어온 척후병의 보고에 따르면 대구 관군이 의병군을 공격하려고 구성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참모들의 의론견의 분분했다. 한편은 거사의 목적을 역설하며 동족끼리 죽이지 말고 돌아가라는 통문을 내자고 하고 한편에서는 일전을 벌이자고 해서 여중룡은 우리는 오합지졸이라 먼저 싸움을 걸어서는 안 되니 험한 요새를 지키면서 관군이 스스로 물러가기를 기다리자 했으나 모두가 듣지 않아 선제공격하기로 했다.

중군 양제안은 백여 명을 이끌고 대덕면 봉곡리 조룡을 거쳐 야밤에 관군이 있는 구성에 당도하고 의병장 이기찬은 수백 군병을 배불리 먹이고 구성을 향했는데 지척을 분간 못할 칠흑 같은 야밤에 부항면 희곡에 당도한 때는 새벽이었다.
이때 대구 관군의 선봉대가 일제히 발포하자 의병군도 응사해 혼전이 벌어졌으나 의병군은 많은 관군을 당해낼 수 없어 군병을 수습하려 후퇴하니 태반이 도주하고 수십 명이 남았을 뿐이었다.
홍심동에 돌아오니 이주필이 진을 지키고 있다가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니 집에 돌아가 신주를 묻고 피신하자고 했다.

남은 의병 10여 명이 부상병 한사람을 번갈아 업고 다음 날에 무주로 향해 김척동에서 유숙하고 영동을 거쳐 다시 황간에 가자면서 유인석·이병구 의사는 청병신사단을 조직해서 청국에 원병을 청하러 떠난다고 한다. 다시는 모병을 할 수 없어 장병들은 거의 호서의 여러 군진에 합세했다.
한편 허위는 황간에서 흩어진 의병을 다시 모아 진천 지방에서 거사하려고 떠났다가 도중에서 전경운이 왕의 봉서를 받들고 와 전했는데 내용은 곧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왕명이라 하는 수 없이 장졸들을 타일러 각각 돌려보내고 감회의 시 한 수를 읊었다.

↑↑ 허위

호남 3월 달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네
산새도 어떻게 시사(時事) 급함을 알고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김천·성주 등지에서는 왕산 허위(旺山 許蔿)·지산 이기찬(止山 李起燦)·이은찬(李殷贊)·조동호(趙東鎬) ·이기하(李起夏) 등의 의거가 있었다. 즉 일찍부터 우국강개의 뜻을 품고 허위 등은 각처에서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 봉기활동이 있음을 보고 거사를 결의하고 1896년 음력 2월 10일 김천 장날을 기해 김천읍으로 들어가서 장정 수백 명을 모집하고 이어 무기고를 차지해 무기 군수품 등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격문을 각 고을에 보내 군사를 모집해서 아래와 같이 지휘부를 개편했다.
<자료제공 :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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