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오피니언 칼럼

칼럼- 초읽기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0.08.19 19:17 수정 2020.08.19 19:17

정선기(시인·전 부산일보 논설주간)

사람은 시간적 존재이다. 시간의 질량(質量)은 곧 삶의 질량을 가늠한다. 시간의 질(質)은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이고 시간의 양(量)은 사람이 얼마나 살았느냐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시간의 질은 시간이 포함하고 있는 절대적 무한적 가치이며 시간의 양은 시간이 존재하는 상대적 유한적 길이이다. 사람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며 무엇을 하고 살았느냐는 시간의 내용에 따라 삶의 내용, 곧 삶의 가치는 달라진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가고 오지 않는 시간, 아니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시간을 생각한다. 우리는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하루를 눈코 뜰새없이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시간은 정지된 채로 제자리에 있다. 도무지 변하지 않는 태초의 원형물질 그대로, 모든 것을 변화시키며, 일체의 존재를 무화(無化)시키며, 현재를 과거로 돌려보내며 시간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시간 속에서 자연과 인간은 의미변화를 거듭했다. 변화의 중심에는 항상 시간이 자리잡고 있다. 인류역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역사는 시간의 축적이며 시간 속에서 변화한 퇴적물이다. 그 시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거대한 변신을 꿈꾸고 있다.
새 천년이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해서 세기적 흥분에 들뜰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서 20년이 훌쩍 지났다. 20세기는 서서히 저물고 서기2000년이 불가항력적인 거대한 힘으로 1000년대를 밀어붙였다. 꼼짝없이 서기 1천년대는 시간에 의해 역사의 뒤안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펴낸 ‘1초를 잡아라’는 책자는 초(秒)의 의미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시간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알고 이해하는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지혜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1초에 기껏해야 몇 발자국밖에 뛰지 못하지만 빛은 1초에 지구 둘레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돈다.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몇 발자국을 갈 수도 있고 지구를 몇 바퀴나 돌 수도 있다. 시간을 거듭하면서 역사는 발전해 왔고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지금의 1초에 일어나는 변화는 인류 최초의 1세기 동안 이루어졌던 변화에 맞먹는다.

시간을 창조하는 데는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1초라는 시간은 얼마나 긴 시간이며 1초 동안에 어떤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를 상상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1초란 형편없이 짧은 시간이며 도대체 하나의 시간 단위로서 의미가 있을까 의심이 갈 정도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 단위는 초가 마지막이며 그것보다 더 세분된 단위는 없다. 초(秒) 위에 분(分)이 있고 분 위에 시간(時間), 시간 위에 일(日), 일 위에 월(月), 월 위에 년(年)이 있고 그 위에 세기(世紀)가 있다.

1967년 국제도량형총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알쏭달쏭한 정의를 내렸다. “초는 원자번호 133인 세슘원자의 바닥상태에 있어서의 두 초미세구조 준위 사이의 전이에 대응하는 복사의 91억9,263만1,770주기의 계속시간으로 한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복사의 한 사이클이 92억번 반복되는 시간을 초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초 동안에 92억번 반복해서 일어나는 사건이 있다는 얘기다.

한 사이클이 92억번 반복되는 시간을 초라고 할 때 1초란 찰나(刹那)이면서 동시에 영원(永遠)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정말 중요한 사건은 찰나 중에 일어난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수명을 150억 년이라 추정하고 장구한 우주역사 중 최초의 1초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규명하는 것을 현대천문학의 최대과제로 삼고 있다. 150억 년을 해명하는 열쇠가 최초의 1초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우주역사에 있어서 처음 1초는 그 이후 150억 년보다도 더 중요한 내용을 갖고 있다.

모든 시간은 서로 똑같지 않다.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크로노스 시간과 카이로스 시간으로 나눴다. 크로노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간,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있는 그대로의 시간이다. 거기서 모든 시간은 길이에 의해 결정되며 자연적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길이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는 1초가 1년보다 길 수도 있고 1년이 1초보다 짧을 수도 있다. 카이로스 시간이란 찰나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시간이다. 4년 동안 피나는 연습을 한 육상선수가 올림픽 100m 결승에서 1등으로 골인하는 순간의 마지막 1초는 카이로스 시간이다.

찰나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마음이 영원을 사는 마음이다. 지혜있는 사람은 세월을 아낀다. 어느덧 이 하루도 낙조에 물들고 있다. 찰나처럼 지나간 시간들이 아쉽고 애닯다. 그러나 찰나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세상에서 초를 다투며 살아가면서도 시간을 소유한 자가 되어야 하리라.


저작권자 새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