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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종합

삶의 향기- 가을 보너스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19.11.14 21:02 수정 2019.11.14 21:08

한외복(수필가·선주문학회 회원)

서산으로 꼬리 감추는 햇살의 여운이 별나게 곱던 휴일이다.
가을 따라 출타한 남편의 귀가가 늦어지고 아이들은 제 방에 틀어박혀 기계로 세상과 소통하느라 가을 앓이 하는 엄마는 안중에도 없다.

무료한 시간 텔레비전 앞에서 달래다가 꾸벅꾸벅 졸며 몽환에 빠져 생각을 잠깐잠깐 놓칠 즈음 전화기가 울린다. 몽환을 깨트릴세라 건성으로 받는 전화 저 쪽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낯설다.
뭉뚱그린 어눌한 발음을 하며 저 쪽 목소리가 안 들리는 듯 머릿속으로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빛의 속도로 검색하느라 쥐가 났지만 끝내 몰랐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전화받냐?”
“어! 정화야, 오랜만이다.”
서울 말투에 서운함이 감지된다.
잠자다 깬 듯 “여보세요”를 반복해 외치며 목소리의 이름을 찾던 순간을 들켰나 보다.
“아아알지. 정화 아니냐? 웬 일이냐? 가을이라 전화했냐?"
“오늘은 산에 안 갔냐? 너네 신랑은?”
“신랑. 내 신랑은 왜? 내 신랑한테 볼일 있냐? 내 신랑 어제는 월출산, 오늘은 진주 갔는데 아직 안 왔다.”
“그럼 너하고 통화해도 되겠다.”
“통화하고 있잖아. 잘 살고 있지?”
“너하고 통화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 통화해도 되니?”
“오십이 넘었는데 신랑 눈치 때문에 통화 못할 사람이 어딨니? 신랑이 없지만 있어도 괜찮으니 누군지 바꿔라.”
“얘, 있잖니? ㅇㅇ이. 내 고종사촌.”
“응? 누구?. 아아아~~ 생각난다.”
“중학교 여름방학 때 서울에서 우리 집에 놀러 왔던 ㅇㅇ이.”
“지금 고향집 오빠 식당에서 밥 먹다가 네 카톡 프로필 사진 보여 줬더니 통화하고 싶은데 부끄럽다고 한다.”

잠은 천리 밖으로 달아나고 시간은 3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500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서 공기놀이 하다가 처음 봤었던가. 외갓집에 온 서울말 쓰는 이방인을 또래의 깨복쟁이 시골아이보다 키가 훌쩍 크고 코 아래 거뭇한 솜털이 슝슝났던 그 아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없었어도 반곱슬머리에 가지런한 치아로 웃는 모습이 해맑던 그 아이. 무뚝뚝하고  억세던 경상도 아이들의 언어들 속에서 나긋나긋한 서울말을 쓰던 그 아이다.

노래를 잘 했던가! 잘 웃었던가! 여자애처럼 수줍음이 많았던가! 휘파람을 휙휙 잘 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켜켜이 더께 넘은 세월 기억의 박물관에 보관된 그 아이의 모습이 희미하다.
“여보세요. 저 아시겠습니까?”
“여보세요. 네.”
“참 오랜만이지요. 저 기억납니까?”
“아. 네. 네. 목소리가 그대로네요. 까까머리 14살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원래 예뻤지만 이렇게 예쁜 줄 몰랐습니다. 그때 제가 좋아한 거 알고 계십니까?”
“지금 술 마셨지요? 술 깨고 보면 제 모습 박색으로 보일 겁니다.”
“하하하하 깔깔깔깔”
“지금 사시는 곳이 구미입니까?”
“네. 언제 정화랑 한 번 놀러 오세요. 금오산 안내와 동동주에 파전까지 책임집니다.”
언제나 어긋나는 인연이 사람 관계인 모양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옛날 고등학교 적 기혼이었던 가정선생님이 그러셨다. 너희들은 사랑을 할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라고. 그래야 행복하다고 가르쳐 주셨다.
사랑에 무슨 법칙이 있던가, 무작정 좋은 게 사랑인데 풋사과 같은 풋사랑은 상큼해서 좋고 첫사랑은 아름다워서 좋고 짝사랑은 아련하고 애틋해서 좋고.
풋사랑이거나 첫사랑이거나 짝사랑이거나 이제는 멀고먼 뒤안길, 지나간 사랑은 눈물 뿌린 이별도 고운 단풍처럼 모두 아름답다.

사람이 회자되고 사랑이 회자되는 노을 언저리다. 오늘 저녁노을이 유난히 붉더라니!
남편에게 부엌데기로 낮춰 보지 말라고, 아직은 여자라고 오늘 있었던 말을 했다.
“그대는 참 좋겠오. 이 가을에  찾아주는 사람도 다 있고 참 행복하겠오.”
질투 섞인 대답을 한다. 상실의 계절 가을에 받은 뜻밖의 보너스다. 헤실거리는 웃음이 자꾸 난다.
*구성면 출신 수필가로 현재 구미에서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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