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날을 맞는다는 것은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이다. 우리는 두 번 다시 똑같은 강물에 몸을 담글 수 없다. 시간이라는 틀 속에서 반복과 회귀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같이 흐르는 것이지만 시간이 강물과 다른 점은 강물은 눈으로 볼 수 있으나 시간은 볼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흐르는 시간의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시간을 소유할 수 있다. 시간은 시간의 의미를 아는 자의 것이다.
실러는 말하기를 “시간의 걸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고 했다. 시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고 있다. 공간은 우리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지만 시간은 차례로 조금씩 체험되고 있을 뿐이다. 시간은 미래로 쏜살같이 달려가면서 인간을 동반하기도 하고 탈락시키기도 한다.
신(神)은 각자에게 시간을 할당해 주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지켜보고 있다.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을 어떻게 직조(織造)하느냐에 따라 비단이 될 수도 있고, 넝마가 될 수도 있다. 직조의 정성과 기술에 따라 직물의 가치는 달라진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처음과 나중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직선적 시간관이다. 천지창조가 이뤄지면서 시간은 나타나기 시작하여 신의 뜻에 따라 삼라만상이 진행되다가 세상종말이 오고 시간은 멈춘다. 신 안에서는 하루가 천년이 되고 천년이 하루가 되는 초월적 시간개념이 적용되는 것도 흥미롭다.
시간은 생명이다.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만이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며, 생명을 값없이 얻는 사람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머무를 순간을 허락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을 소유하지 못하면서도 가진 것이라곤 시간뿐이라는 역설적 존재다.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처럼 우리는 지금 시간 속을 유영하고 있다. 우리는 거대한 시간의 공간을 정처 없이 헤매는 나그네이다. 시간에 관하여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시간의 낭비인지 모를 일이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각박한 시간의 가장자리에 하릴없이 주저앉아 마치 시간이 날개를 달고 와 나의 값진 세월을 훔쳐 가는 기분에 젖어 있을 때가 간혹 있다. 그럴 때는 시간이 한없이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누가 시간을 옭아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누가 시간을 훔치려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것이다.
그는 흔들의자에 앉아 시간을 쳇바퀴처럼 돌린다. 그는 돋보기를 끼고 손바닥 위의 시계를 본다. 그가 시계를 보는 순간 시간은 그제야 느릿느릿 움직인다. 그의 이마를 가로지른 주름살은 과거고, 그가 흔들의자 위에서 하품하는 순간은 현재다. 밀림에서 빛나는 햇살처럼 그의 시간은 늘 잘 닦인 항아리 같았다. 그의 생활을 빠져 나온 시간, 그는 그 시간 속을 들락거리며 산다. 이제 그의 시간은 전지가 다 닳은 전자시계처럼 머뭇거린다. 세월 좋을 때 잘도 가던, 머리가 잘 돌아갈 때 잘 풀려 나가던, 그의 앞에는 시계가 늘 멈춰서 있다. 박제된 시간이 된 그는, 흔들의자에 앉아 고장난 시계를 흔들고 있지만,
-졸시 ‘흔들의자 위의 시간’ 전문
우리는 불안정한 시간의 흔들의자 위에 앉아 있는 형국이다. 언제 흔들의자 위에서 나뒹굴지 않을 수 없는 불안한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일순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주제인 만큼 영원을 일순간의 시점에서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쩌면 박제된 시간을 부둥켜안고 허우적대는 우리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흔들의자 위의 시계가 차라리 고장난 시계이기를 바란다. 1초에 91억9천2백63만1천7백70번이나 진동하는 세슘원자의 파장으로 시간을 결정하는 초정밀원자시대에 고장난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면 정신나간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정상적인 행동양식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에 시계라도 고장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미래에 의해 추방되고 무화(無化)되는 성질을 가졌다. 현재는 미래에 의해 필연적으로 과거로 밀려난다. 과거란 미래에 의해 밀려난 현재이기 때문에 현재 속에는 없는 것이며 미래는 현재 속에는 없지만 반드시 현재를 밀어내고 현재가 된다. 현재는 밀려날 운명으로 잠시 머뭇거리는 시간이다. 시간은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부단히 흘러가는 까닭에 일체는 시간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변화하게 된다.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 사물은 시간 속에 있지 않다.
현재의 과거화, 미래의 현재화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흔들의자 위에 앉아 있다. 흔들의자 위에서 흔들리는 자체가 변화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의 神’ 크로노스의 맹추격을 받는 우리는 시간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봉산면 출신 시인·언론인으로 현재 부산에서 생활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