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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6·25 특집 김천과 한국전쟁의 참상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5.06.24 15:39 수정 2025.06.24 15:47

7월 31일 김천시 전역에 소개령 발동해 피란 시작
증산 부항 등에서 아군과 북한군 간 치열한 전투
폭격으로 김천시가지 대부분 잿더미로 변하는 등 피해 극심

△1950년 북한군이 철수한 뒤 6·25 전쟁 후 촬영된 모암동 삼각로타리 일대 전경

6·25전쟁이 발발한지 75주년을 맞았다. 최근 유럽과 중동에서의 전쟁으로인해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뉴스를 통해 보도되고 있어 전쟁의 참화를 겪어본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동족상잔의 상흔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남아있으며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노년세대가 이를 직접 증언해주고 있다. 우리 고장 김천은 예부터 교통의 요충지요, 한반도 남부의 중심지인 관계로 아군과 적군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져 전국에서도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6·25 전쟁 75주년을 맞아 본지에서는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전쟁의 참상과 당시 김천에서 벌어진 숨겨진 이야기들을 시민들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편집자주>

전쟁의 참상

김천시민들은 당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 38선 일대에서 수시로 벌어진 국지적인 교전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전세는 가열돼 마침내 서울이 함락되고 남쪽으로 줄을 잇는 피란 대열을 보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각급 학교는 7월 초순 일제히 휴학에 들어갔고 7월 31일 오후 김천시 전역에 소개령이 발동됐다.
각 기관 단체들이 시민들에게 후퇴령을 내린 그날 밤 11시, 김천역에서 마지막 열차가 부산을 향해 황급히 떠나갔다.
7월 초부터 서울 방면에서 밀려오는 피란민 대열은 하루에도 10만명에 이르렀으며 피란민 행렬 속에는 공산 측 오열이 섞여 있어 군 당국이 작전상 이유로 7월 중순부터는 경부선 국도를 차단했기 때문에 피란 대열은 개령면을 경유하는 선산 방면 국도를 가득 메웠다.

후퇴령이 내려진 이틀 전날인 29일 영동을 통해 진입한 인민군 선발대가 지례면 관덕리에 출몰해 당시 증산면에 후퇴해서 머물고 있던 경기도 이천경찰서와 증산지서 경찰관, 유성리 청년단원 등 200여명의 병력이 출동해 인민군 15명과 교전 끝에 11명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했다. 1명은 도피하여 민가에 숨었다가 달아나면서 숨었던 집 가족을 사살했고 결국 그도 생포됐는데 이 전투가 김천지방에서는 처음이다.
또 다른 선발대가 대덕산 산맥 능선을 타고 지례 방면으로 침입해 주민들을 놀라게 했는데 31일 구성면 송죽리 도로를 차단하고 구성에 주둔하고 있던 충북 경찰부대 및 미군 부대와 적이 궁장고개에서 만나 한바탕 교전을 벌여 10여명의 전사자를 낸 아군이 퇴로가 막혀 성주 방면으로 철수했다. 소개령도 후퇴령도 알지 못한 면부 김천 주민들은 소중한 물건들을 땅속에 묻거나 그냥 버려둔 채 당장 요긴한 것을 챙겨서 귀중한 재산이기도 한 소에다 싣거나 달구지 리어카에 싣고 이것도 없는 사람은 짐을 만들어 메고 선산·성주 방면으로 황망히 피란길에 오르기도 했다.

8월 1일 오후 3시경 왜관 경부선 철도와 인도교가 한강처럼 폭파됐다. 이 통에 며칠을 두고 강을 건너지 못한 피란민들은 결사적으로 강을 건너려다 애석하게 죽어간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며 야음을 타 널빤지나 급조한 뗏목으로 강을 건너간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공산군을 앞질러 와서 남하를 막는 바람에 부랴부랴 발길을 되돌려 집으로 돌아오거나 성주·선산 등 후미진 골짜기를 찾아 옮겨 다니면서 피란살이를 해야만 했다.
8월 3일 적군 점령하에 들어간 김천은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을 단숨에 건너려는 적군의 임시사령부가 감천변과 김천고등학교 운동장에, 남면 부상터널에 인민군 임시 야전병원이 설치되는 등 김천시 전역은 일순간 인민군의 최전방사령부가 되고 말았다. 이에 유엔군은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해 시내전역은 일시에 불바다가 됐으며 주택의 80% 이상이 완파되고 말았다.

또 피난을 가지못한 시민들은 공산군 정치 선전대와 그들에게 동조하는 좌경인사들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치안대·농민동맹·여성동맹 등을 조직해 시민들을 못살게 했다. 공산군은 유엔군의 폭격이 뜸한 야간을 이용해 시민을 강제로 동원해 도로와 교량 등을 복구하는데 부역을 시켰으며 군량미과 탄약 운반 등에도 동원해 김천이 적군에게 점령됐던 50일 동안 온갖 곤혹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8월 15일까지 대구를 함락시키고 부산으로 진입하려던 공산군은 낙동강 영천 전투에서의 대패와 인천상륙작전으로 완전 전의를 상실하고 북으로 패주하기 시작했다. 50일간 시달림에서 해방된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란살이에서 돌아온 시민들은 잿더미로 변해 버린 정든 고향의 처참한 모습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종전 후 경상북도 전쟁피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도내 피난민과 이재민의 수가 73만명이 넘고 인명피해는 전사자 25.800명, 부상자 11.700명, 피살자 1.500명인데 이 중에서 김천이 차지하는 수치가 상당한데 정확한 자료가 없다. 주택 상황조서에서 전소 밀 완전파괴 60.600여개소, 일부파괴 6.600으로 여기서도 김천피해는 상당할 것이다. 다만 1958년 발간된 ‘경북대관’에 따르면 김천시의 경우 3,739동의 건물피해를 입었고 교량 3개소, 도로파괴 12개소, 가축은 전멸에 가까울 정도였다. 재산상 피해액은 당시 가치로 2억 7,823만 2,000환으로 집계됐으며 인명피해는 그 숫자마저 추산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피난살이의 설움

김천소개령이 내려진 뒤 대부분의 시민들은 마을 뒷산이나 골짜기로 숨거나 선산 낙동강까지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요행히 낙동강을 건너간 사람은 3만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들 중 일부는 부산, 밀양 등지로 가고 대다수는 대구, 청도, 경산 등으로 갔는데 특히 대구 금호강변과 청도군 매전면 매전리 강가에 집단으로 김천인 피란마을을 형성했다. 김천시에서는 임시출장소를 설치하고 양곡을 배급했으며 김천경찰서에서는 피난민 원호파견대를 보내 고성이씨재실에 임시본부를 설치하고 피란민의 보호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때가 전쟁와중이고 국가운명이 위기였던 시기인지라 난민구호가 원할할 수 없었으며 교통통신 수단이 오늘날처럼 원활하지 않아 한계가 많았다. 경찰원호파견대는 우선 치안확보를 위해 피란민으로 경비대를 조직운영하는 한편 질서유지를 위해 그들 중에서 감찰대를 조직해 질서를 바로잡고 익어가는 농작물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등 원주민으로부터 동정심과 이해를 갖도록 노력했다. 또한 파견대는 시군 출장소로 하여금 난민실태를 면밀히 파악해 노약자 임산부 병자들을 원주민의 집에 들어가 살 수 있도록 노력했다.
3일에 한번씩 연락병이 공문을 가지고 와 사람들을 모아놓고 뉴스 등 전황 설명을 해주어 서글픈 피난살이를 달래주었다. 때로는 김천시정, 금릉군수 등 지역유지들이 현지를 찾아와 피란민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적군이 후퇴하자 경찰파견대에서 피난증명서를 발급했고 마침내 대부분의 김천시민들이 9월 20일경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쟁중 김천지역 교전상황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던 중 1948년 8월과 9월 남북한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후 그 혼란은 극에 달했다. 같은 해 10월 여수순천반란으로 14연대 반란 군인들이 지리산을 비롯한 소백산맥으로 숨어들어 인민유격대를 편성해 게릴라전에 돌입했다.
김천에서도 지리산을 거쳐 백두대간을 따라 삼도봉과 수도산, 단지봉일대까지 올라와 게릴라활동을 하며 이른바 보급투쟁을 벌여 부항면과 증산면, 대덕면, 구성면 주민들을 대상으로 약탈과 방화, 살상을 자행했다. 주민들은 자구책으로 부항지서 경찰관들과 협의해 지역유지들로부터 찬조금을 받아 1949년 4월부터 5월까지 2개월간 콘크리트망루와 부항지서에서 망루까지 연결하는 터널, 적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나무울타리를 구축했다.
1949년 11월1일 오후 1시에 대덕지서에 완전무장을 한 공비 15명이 침입해 10시간 동안 교전을 벌여 격퇴했으나 이경로 순경이 적탄에 맞아 사망해 김천경찰서의 제1호 피습사건으로 기록됐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해 빠른 속도로 남하하자 경북 경찰은 시군 경찰서에 15명씩 차출해 경북지역 각 전투지구에 배치됐다. 7월 22일 경북 경찰 총동원령에 따라 김천경찰서 대원들로 추풍령을 비롯한 경계지에 배치돼 전투에 참가했으나 많은 경찰관들이 희생돼 작전상 후퇴하게 됐다. 7월 29일에는 구성면에 출몰한 인민군에 대항하기위해 미군과 합동 작전에 참여했던 김천경찰서 여덕환 경사가 인민군에 포위되어 전사했다.

1950년 8월 2일 왜관 칠곡금융조합에 후퇴한 김천, 상주, 문경, 서산경찰서 경찰관들이 모여 조직된 중부지구전투사령부에서 김천경찰서장이 사령관을 맡았다. 8월 3일에는 김천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으로 김천경찰서와 구성, 지례, 부항, 아포, 남면지서가 소실되고 김천경찰서 임시청사로 성내동 김천극장이 이용되고 서북청년회관 2층 중앙의원을 임시 유치장으로 사용했다.
12월 11일 부항면 해인리 뒷산에 금릉군당 및 면당 공비들이 잠복해있다는 정보를 귀순자를 통해 입수했다. 사살공작대장인 임인도경감은 형사주임 이동덕경위와 사살유격대장 박용주경사가 이끄는 15명을 인솔하고 귀순자를 대동해 아지트를 습격했다. 이 작전으로 부항면 당책 2명을 사살하고 14명을 포로로 잡고 소총 7정을 노획했다. 이어 다른 아지트를 급습해 구성면 당원 등 24명을 사살 혹은 생포하고 소총 다수를 노획했다.

1951년 1월 30일 구성면 작내리 뒷산의 금릉군당 조직부 아지트를 급습해 2명을 사살하고 조직부장 서기현 등 3명을 생포했다. 2월 23일에는 감천면 양천동에 침입한 금릉군 당간부 1명을 사살하고 군당 기획책 정영수 등 2명을 생포했다.
2월 25일에는 수도산에서 적 57사단 아지터 3개소를 새벽 4시에 급습해 10명을 사살하고 소총 9정을 노획했다. 10월 7일 새벽 5시경 수도산 단지봉에서 적 57사단 연락아지트를 급습해 10명을 사살하고 제57사단 3연대 작전참모 허찬형 등 간부 4명을 생포했다. 이와 같은 사살공작대의 활약으로 총 사살 87명, 포로 31명, 소총 34정의 성과를 거뒀다.

1950년 미군의 김천폭격으로 소실된 김천경찰서를 대신해 김외과건물을 임시경찰서로 사용하다가 1952년 4월 용두동 202번지 목조건물을 1.200만환으로 임대해 이전했다.
1952년 7월 14일 대덕면 문의리에 완전무장한 인민군 145명이 출현해 김천경찰관들과 1시간여간의 교전 끝에 적 사살 3명, 생포 2명, 총기 다수 획득의 전과를 세워 이동덕경위 등 3명에게 무공훈장이 수여됐다. 1953년 9월 12일 12시경 아포읍 인리에 적군 3명이 은신해있다는 정보를 아포지서 주임 조용근 경사가 입수해 아포지서 경찰관 5명이 출동해 제3지구당 유격대부대장 전현 등 3인을 생포하고 소총 2정, 권총 1정, 실탄 300발을 압수해 군에 인계했다.

<자료제공:김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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