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요양원에 가신지 두 달이 되었다. 그간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누워계셨는데, 하루는 벽에 걸린 달력을 가져오라 하셨다. 손 없는 날짜를 짚으시고 이 날짜에 요양원으로 가겠노라 하시는 거다.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반전이었다.
요양원에 들어가시는 그날도 비록 휠체어에 앉긴 했으나 선글라스에 밀짚모자를 쓰신 90세, 우리 엄마였다. 동네 사람들은 대문을 열고 나와 “어르신 잘 다녀오세요”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고 여행 가시듯 즐겁게 집을 나섰다.
막상 엄마를 보내고 나니 몸은 좀 수월했으나 만감이 교차했다. 무얼 먹어도 엄마 생각이 나고 지나가는 노인만 봐도 엄마 생각에 울컥했다. 그런데 한 보름쯤 지나자 하루에 열 통, 스무 통씩 전화가 빗발쳤다. “창살 없는 감옥이다”, “밥맛이 없다”, “내 집 놔두고 무슨 고생이냐”며 “당장 데리러 오라”는 것이다.
엄마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가슴이 저려왔다. 정말 어찌해야 될까, 무엇이 맞는가,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 다시 모시고 오자니 엄두가 안 나고, 직장 일도 그렇고, 무남독녀인 내가 혼자 감당하기엔 버겁기도 했다. 어느덧 내 나이도 있는지라 여기저기 아픈 곳도 생기고……. 그동안 고민했던 그 무엇과도 다른 무게로 온통 나를 옥죄었다. 울고 싶었지만 울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물어볼 일도 아니었다.
몇 달 전에 만났던 친구 생각이 났다. 시골 출신답지 않게 잘 생기고 양복도 잘 어울리는 그였다. 육 남매의 장남으로 살아온 이야기, 어린 동생들을 두고 엄마가 떠난 이야기, 승진하기 위해 앞만 보고 살아온 남자의 일생을 듣게 되었다. 내가 보기엔 어려움 하나 없이 살아왔을 것 같은데 아내와 아버지의 갈등을 털어놓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남인 자신이 아버지를 모시고 싶었지만 아내의 반대로 모실 수가 없었다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는 그날도 흩어져 있던 육 남매가 가족회의를 하였고 아버지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장날 끌려가는 소처럼 눈물 흘리며 들어가게 되었다 했다. 차라리 치매라도 걸리셨음 좋았을걸……. 그 후 가끔 요양원에 방문했을 때도 집에 가고 싶다고 사정하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며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다가 그만, 8개월 만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단다. 친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잠을 통 못 잔다고 했다. 병원에 갔더니 우울증이라 하더란다. 자려고 누우면 아버지 생각이 자꾸 나고 지금까지 이 악물고 살아온 자신도 너무 가엽다고 했다.
내 앞에 외로운 섬 하나가 울고 있었다. 남자이기에 참아야 하고 남자이기에 울지 못한 어린 소년이었다. 가장으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사나이답게 살아보려고 불끈 쥔 두 주먹이 얼마나 아팠을까.
사실 그동안 여자의 일생만 고달픈 줄 알았다. 새삼 남자를 안아줘야 할 사람은 여자였구나 싶기도 하다.
우리는 내일을 살아보지 않았기에 마주하는 매 순간이 낯설고 처음이다. 그저 내일, 또 내일 하며 앞만 보고 왔는데 어느새 노인이 되어 덩그러니 앉아있게 된다. 내 부모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알기에 더욱 명치끝이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