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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김천의 숨은 명소- 인현왕후길 무흘구곡 청암사 펼쳐진 수도계곡

권숙월 기자 입력 2019.10.28 14:40 수정 2019.10.30 21:19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은거한 청암사와 인현왕후길
영남의 대학자 한강 정구선생이 극찬한 무흘구곡

본지에서는 김천문화원 송기동 사무국장의 자료제공으로 기획특집 김천의 숨은 명소 '인현왕후길 무흘구곡 청암사 펼쳐진 수도계곡'을 소개하게 됐다. <편집자 주>
↑↑ 청암사

김천에 여름이면 영남각지에서 몰려든 인파로 발디딜틈이 없는 명소가 있다. 바로 증산면 수도계곡 일대이다. 어디 여름뿐이랴. 가을이면 만엽홍산(萬葉紅山)이 빚어낸 수도계곡을 뒤덮어 단풍객들을 유혹한다. 말 그대로 증산면 수도계곡은 김천의 알프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절경 속에 감추어진 역사와 흥미진진한 전설은 속 깊이 감추어진 선물보따리다. 한국관광공사에서 걷고 싶은 길로 선정한 인현왕후 길과 영남예학을 집대성한 한강 정구 선생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무흘구곡, 천년고찰 청암사와 수도암을 품은 수도계곡이 있다.

인현왕후는 왜 청암사로 숨어들었나?
조선 후기 당쟁의 소용돌이가 극에 달했던 숙종 재위기에 서인과 남인의 대결 양상은 극심한 사회혼란을 야기했고 그 와중에 서인으로 강등된 인현왕후가 수도산 청암사를 은거지로 택함으로써 수도산 일대가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시기가 있었다. 인현왕후가 울분을 곱씹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내왕했을 인현왕후 길은 청암사에서 수도계곡을 가로질러 수도암으로 이어진다.
↑↑ 인현왕후


청암사로 몸을 숨겨야한 인현왕후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인현왕후는 조선 제19대 숙종(肅宗)의 계비(繼妃)로 1667년(현종8년) 여양부원군 여흥민씨 민유중(閔維重)과 은진송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현왕후의 외할아버지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은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서인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아버지 민유중, 오빠 민진후 등 일가의 대부분이 송시열의 제자로 인현왕후의 가문은 서인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고 있었다.
1680년(숙종6) 인경왕후가 죽고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송시열의 추천으로 1681년(숙종7) 5월 2일 자신보다 여섯 살 많은 숙종과 가례를 올리고 국모가 됐다. 왕자를 낳지 못해 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는데 1688년(숙종14), 숙원장씨(淑媛張氏)가 왕자 윤(昀)을 낳으면서 갈등이 심해졌다.
1689년(숙종15) 숙종이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이 극렬 반대하면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이어지고 남인이 집권하면서 숙원장씨는 희빈(禧嬪)이 됐다. 인현왕후는 남인들의 주장으로 1689년 5월 2일 폐위돼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후 5년간 사가(私家)생활 중 약 3년간 청암사 등에 은거했다.
1694년(숙종20) 폐비복위운동을 계기로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 다시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4월 12일 왕비로 복위됐다. 1701년(숙종27)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고생하다 36세를 일기로 죽어 경기도 고양의 명릉(明陵)에 묻혔다.

장희빈의 모함과 인현왕후를 후원하며 왕권을 위협하는 서인세력의 권력비대화를 막고자 하는 숙종의 정치적 이해가 작용한 가운데 인현왕후는 1689년(숙종15) 서인으로 강등돼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남인세력의 감시와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탄압이 도를 더해가던 중 1692년(숙종18) 5월 안국동 인현왕후의 사가(私家)에 도둑까지 들자 집을 떠나 인적이 드문 첩첩산중 수도산 청암사로 피신해 3년간 은거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인현왕후의 어머니 은진송씨부인의 외가인 상주(尙州)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물심양면으로 지원이 가능한 청암사에 머무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암사에서는 외부로부터 인현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법당 맞은편에 사대부가 양식의 극락전과 남별당(백화당)을 신축하는 등 극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 42수관세음보살을 모신 보광전을 지어 복위기도처로 제공했다. 인현왕후는 상주에 있는 어머니의 외가에서 보내준 시녀 한 명을 데리고 살면서 기도를 드리거나 수도산 곳곳을 다니며 시문을 짓는 것으로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그때 인현왕후가 주로 다녔던 길이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연결되는 현재의 ‘인현왕후 길’이라고 전해진다.
1694년(숙종20) 숙종이 남인세력을 몰아낸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복위된 후 청암사에 보낸 친필 한문편지에서 “내가 큰스님의 영험한 기도덕분으로 복권됐다”며 수도산을 사찰보호림으로 지정하고 전답을 하사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훗날 극락전을 중창할 때 대들보에서 발견된 시주록(施主錄)에는 궁중상궁 26인의 이름이 올라있어 인현왕후로부터 시작된 청암사와 궁중여인들과의 인연은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져 1900년대 초 영친왕의 보모상궁이었던 최송설당에까지 이어졌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 ‘마음의 고향’(1949년)이 청암사에서 촬영된 배경에 인현왕후와 청암사의 이러한 드라마틱한 인연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러한 청암사와 인현왕후의 인연을 선양하기 위해 2년 전부터 청암사에서는 인현왕후 복위의식을 재현하고 있다.
↑↑ 인현왕후 복위의식

인현왕후의 은거지이자 복위기도처가 된 청암사
그렇다면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인현왕후를 품어준 청암사는 어떤 사찰일까? 증산면 평촌리 장뜰마을 뒤 수도산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산에서 발원하여 심산유곡을 이룬 수도계곡에 인접해 예로부터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사천왕문으로부터 계곡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계곡 좌우로 푸른 이끼로 뒤덮인 웅장한 바위벽을 볼 수 있다. 푸른 이끼가 바위를 덮어푸른 바위가 됐다는 뜻으로 푸를 청(靑)에 바위 암(巖)자를 써서 청암사라 했다고 한다.
청암사의 본사인 쌍계사는 증산면 유성리 옥동마을에 있었던 대찰로 1951년 7월 14일 북한군 패잔병들이 임시 증산면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던 쌍계사에 불을 질러 전소됐다. 이때 일체의 자료들이 소실돼 정확한 사찰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도선국사가 850년(헌안왕 3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대웅전의 천장 그림과 4폭 탱화가 유명했었다고 전한다. 소실당시를 목격한 주민들에 의하면 이틀 동안 연기가 났다고 하며 거의 대부분의 전각과 유물이 불타고 훼손된 범종이 남아 청암사로 옮겼다가 지금은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쌍계사의 말사 가운데 하나인 청암사는 본사인 쌍계사로부터 2㎞거리에 위치한 산내암자로 신라 헌안왕 3년(85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창건됐다. ‘청암사사적’에 따르면 “청암사는 이웃한 쌍계, 수도 양사와 함께 신라 헌안(憲安), 헌강(憲康). 양조(兩朝)에 걸쳐 창건된 사찰이며 도선국사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서 건립됐다”고 기록돼 있다. 즉 도선국사가 명당을 가려 나라의 국운을 융성하게 할 목적으로 청암사를 창건했다는 것인데 실재로 청암사의 지형은 예부터 풍수지리로 볼 때 소가 왼쪽으로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전설이 우비천(牛鼻泉) 전설이다.
절 입구의 천왕문 안쪽에 위치한 우비천으로 불리는 옹달샘이 누워있는 소의 코에 해당되고 대웅전이 소의 뿔에 해당되는데 소의 코는 항상 물기가 촉촉이 젖어있어야 건강한 관계로 청암사의 사세가 번창할 때는 우비천의 물이 많이 고여 넘쳐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천왕문 앞으로 다리를 새로 개설해 찻길을 내고부터는 우비천 물이 말라버려 모두들 의아해 했는데 이것은 찻길을 낸 자리가 누워있는 소의 목에 해당해 목을 수시로 차와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기 때문에 소가 아파 우비천의 샘물이 말랐다는 것이다. 또 이 물을 마시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에 따라 스님들은 이 샘을 지날 때마다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청암사는 창건 이래 여러 차례의 화재로 전각이 소실되고 중창하는 일이 반복됐다. 1911년 9월 21일 청암사는 다시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전각이 소실됐는데 대운대사(大雲大師)가 그 다음해 봄부터 대웅전과 육화료, 진영각을 신축하고 1921년 중국 항주의 영은사에서 목조석가모니불상을 조성해 대웅전에 봉안하니 이를 4차 중창이라 한다. 이때 비구니 유안사(有安師)가 2천 환을 시주한 것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시주가 있었다. 일설에 대운화상이 꿈에 빨간 주머니를 여인으로부터 얻는 꿈을 꾼 후에 서울에 갔는데 나이가 많은 보살이 많은 시주를 하면서 자신이 죽은 후 3년간 염불을 해달라고 부탁해 이로부터 불사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암사는 조선시대 때부터 불교강원으로서 명성을 얻었는데 청암사 강원의 효시는 조선 중기 대강백으로 유명한 회암정혜(晦庵定慧.1685~1741) 선사가 1660년 선원과 강원을 설립함으로부터 비롯됐다. 회암선사는 화엄학에 정통한 교학(敎學)의 대가로 당시 청암사로 운집한 학인이 3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불교강원으로서의 명성은 계속 이어져 일제 강점기의 박한영(朴漢永) 강백(姜伯)이 강론할 때 학승의 수가 200여 명에 이르렀고 강고봉(姜高峰) 강백이 가르치던 1975년도까지도 매년 40여 명에 달했다.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면서 현재 110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는 도량으로서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2007년 4월에는 청암사율원을 개원해 계(戒)와 율(律)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의 공간이 마련됐다.
↑↑ 수도암

인현왕후길에 맞닿은 옥녀직금형의 명당터 수도암
수도암은 859년(신라 헌안왕3) 도선국사에 의해 쌍계사의 산내암자로서 청암사와 함께 창건됐다. 김천지역에서 가장 고지대인 수도산 1080m에 자리잡고 있으며 가야산 정상이 연꽃 위에서 합장한 부처님의 손처럼 보인다 해 유명해진 사찰이다. 수도암의 원래 지명은 보광사(普光寺)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해인사와 함께 보광사를 화엄종 10대 사찰로 꼽을 정도로 화음사찰로서의 명성을 얻기도 했다. 창건주인 도선국사는 전국을 답사하면서 신라의 국운을 융성하게 할 명당을 찾을 때 이곳에 절터를 잡고 너무 좋은 나머지 사흘 밤낮으로 춤을 췄다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으로 여인이 앉아서 비단을 짜는 형국의 명당이었던 것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가야산 정상이 실을 거는 끝게돌이 되고 동서로 나눠 선 탑은 베틀의 기둥이며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이 놓인 자리가 여인이 앉아 베를 짜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도선국사는 절을 다 지은 후에 “앞으로 이곳에서 무수한 인물이 배출될 것이다”라고 예언하며 7일간 또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예언이 적중했음인지 수도암에서 많은 불교지도자가 배출됐다.
↑↑ 인현왕후길 약도

조선중기의 선비인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은 기행문 ‘산중일기(山中日記)’에서 수도암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절이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으면서도 평평하고 넓게 트였으며 가야산을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봉우리의 흰 구름은 끊임없이 모였다 흩어지니 변화가 무쌍했다. 앞문을 열어두고 종일토록 바라보아도 그 의미가 무궁해 참으로 절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더 머물고 싶지만 갈 길에 얽매여 뜻을 이룰 수 없음이 안타깝다. 산승들은 모두 여름 뗄감을 마련하러 나갔다.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긴 하루를 보냈다.”
창건 이래 수도암에 대한 내력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1894년 동학란 때 방화로 전소됐다가 1900년 포응화상(抱應和尙)에 의해 중건됐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6.25 사변 중 북한군 패잔병들의 근거지로 이용되면서 전투중 일부 전각이 훼손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1969년부터 주지 법전화상(法田和尙)이 본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약광전, 나한전, 관음전 등을 차례로 중수하고 1975년 선원을 개설했다.
수도암의 본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은 1969년 법전화상에 의해 중수됐으며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집으로 11평 규모이다. 내부에 보물 307호인 석조비로자나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 불상은 그 크기와 양식에 있어 신라하대 9세기경의 불상을 대표하고 있다. 불상의 높이는 250㎝, 무릎폭 210, 어깨폭 140㎝로 비로자나 특유의 지권인(智拳印 왼손 집계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왼손 집게손가락을 누르고 있는 형태로 이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을 취한 당당한 체구인데 상부에 비해 하부의 무릎 부분이 다소 빈약한 것이 특징이다. 현재 불상의 광배가 없는데 이는 제작 당시부터 만들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뒤에 망실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일설에는 과거에 불상이 땀을 흘려 어깨 부위가 늘 젖어있고 푸르게 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 수도암 비로자나불좌상

이 불상과 관련한 전설이 내려오는데 경남 거창의 불당골에서 제작한 이후 규모가 워낙 거대해 완성을 하고도 수도암까지 운반할 방도가 없어 난감해하고 있는데 어느 날 행색이 초라한 노승이 불쑥 나타나더니 불상을 등에 지고 수도암으로 달려가더라는 것이다. 수도암에 거의 다 왔을 즈음 그만 칡넝쿨에 발이 걸려 넘어졌는데 노승은 크게 화를 내며 수도산 산신령을 불러 “부처님을 모시는데 칡이 방해를 해서야 되겠느냐. 당장 절 주위의 모든 칡을 없애라”고 호퉁을 쳤고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수도암 주변에는 칡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광전(藥光殿)은 대적광전 동편에 나란히 위치해 있으며 1969년 법전 화상이 중수했다. 건물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으로 총 8평 규모이다. 내부에 봉안된 보물 제296호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양식으로 볼 때 10세기경인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직지사 약사전의 약사여래와 금오산 약사암의 약사여래, 수도암 약광전의 약사여래를 한 석공이 제작한 후 형제를 맺어주었는데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은 재치기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석불은 불신과 대좌, 그리고 광배까지 갖추어진 아담한 불상이며 두부는 비로자나불상과 마찬가지로 보관을 장식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법계정인 형태의 수인에는 보주를 지니고 있다. 불상의 크기는 불상 높이 104cm, 폭 80cm, 광배 높이 145cm, 폭 106cm, 좌대 높이 76cm, 폭 87cm 이다.
나한전(羅漢殿)은 1969년 법전 화상이 중수했으며 총 15평 규모이다. 모셔진 나한상의 제작연대는 알려진 바가 없고 법당 내에는 석가여래좌상(높이 37cm, 폭 22cm), 좌우협시보살상(각각 높이 25cm, 폭 18cm), 그리고 16구의 석조나한상(높이 20cm, 폭 13cm)을 봉안하고 있다. 수도암 나한상은 영험하기로 유명해 여러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옛날 큰 느티나무가 대적광전 쪽으로 기울게 자라나고 급기야 법당의 기와를 상하게 해 비가 새어 스님들이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노승 한 분만이 절을 지키는데 밖에서 “영차,영차”하는 소리가 나더니 “쿵”하는 소리가 들려 밖으로나가보니 대적광전으로 기울던 느티나무가 뿌리째 뽑혀 법당 앞에 거꾸로 박혀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한전으로 가 보았더니 나한들의 어깨와 손에 느티나무잎과 껍질이 묻어있었다.
그 후 나무는 잘라 화목으로 사용하고 밑둥은 근년에까지 남겨두었는데 1969년 선원을 지을때 치웠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도 전해진다. 어느 날 수도암 스님이 거창에서 공양미를 메고 수도산을 넘어오는데 한 동자승이 나타나 “저는 수도암의 스님이 저를 보내어 공양미를 받아오라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하며 쌀가마니를 메고 나는듯이 산을 넘어갔다. 뒤따라 수도암에 도착해보니 쌀가마니는 마루에 있는데 방금 보았던 동자승이 없어 스님들에게 자초지정을 이야기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나한전으로 가 살펴보니 나한상의 어깨에 지푸라기가 묻어있더라는 것이다.
보물 제297호인 대적광전과 약광전 앞 삼층석탑은 수도암 창건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탑은 단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했고 그 하부에는 지대석 위에 넓은 판석을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1층 탑신에는 사방에 감실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는 연화대 위에 여래좌상을 1구씩 배치했다. 총 높이 376cm이며 상부에는 노반과 복발, 그리고 보륜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서탑 역시 동탑과 동일한 양식이나 세부 수법에서 차이가 있는데 1층 탑신 사방에 동탑에서와 같이 감실을 형성하지 않고 부조상으로 처리된 점이다. 높이는 425cm이며 상부에 노반과 보주가 남아 있다. 삼층석탑 사이에는 석등과 ‘創主道詵國師’라고 새겨진 돌기둥이 있다.
↑↑ 인현왕후길

  한강 정구선생이 노래한 수도계곡

대가천, 옥동천, 수도계곡으로 불리며 수도산에서 발원해 풍부한 수량과 기암괴석과 단풍으로 인해 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김천의 대표적인 자연경관으로 이 일대는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주땅이었다.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이자 예학자로 한원당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선생이 처향인 성주에 정착해 영남 남인학파의 종주로 활동할 당시에 중국 남송 주희의 시(詩) 무이구곡을 본따 수도계곡의 절경지 아홉 곳을 7언 절구의 시로 노래했으며 구곡 중 현재 성주군 관할에 1~5곡, 김천시 관할에 6~9곡이 있다.
특히 무흘구곡의 마지막인 용소폭포는 높이가 17m, 선녀탕으로 불리는 물구덩이 깊이가 3m에 달한다. 옛날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실제로 폭포 바위절벽에 흰색으로 용의 형상과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옛날 수도암에서 종을 훔쳐 도망가던 도둑이 발을 헛디뎌 종이 폭포로 떨어졌는데 이후부터 비오는 날이면 종소리가 울린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용추 또는 용소폭포라 불리는 이곳에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 용소폭포

무흘구곡(武屹九曲)

정 구(鄭 逑)

일곡 봉비암(一曲 鳳飛巖)
첫째 구비 여울에다 낚시배 띄우노라
석양 냇가 바람에 흔들리는 낚시줄 뉘 알랴
인간세상 온갖 생각 다 버리고
박달삿대 짚고서 저녁 안개 헤치는 걸

이곡 한강대(二曲 寒岡臺)
둘째 구비 아름다운 봉우리가 되었다는 곳
봄꽃 가을낙엽 단장도 고울시고
이럴 때 이 경관을 영균이 알았더라면
이 소경에 한 구절 덧붙여 말했으리

삼곡 무학정(三曲 珷鶴亭)
셋째 구비 누가 배를 이 산골에 감추었나.
밤에도 훔쳐갈 이 없이 천년을 지났네
대가천 건너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마는
건네주지 못하니 홀로 안타깝구나

사곡 입암(四曲 立巖)
넷째 구비 백 척 바위 바위에 구름 걷히고
바위 위 꽃과 풀은 바람에 나부끼네
그 누가 이런 맑음 알겠는가
중천의 맑은 달은 맑은 못에 잠겨있네

오곡 사인암(五曲 捨印巖)
다섯 구비 맑은 못은 그 깊이가 얼마인가
못가의 솔과 대나무는 저절로 숲을 이루었다.
복건 쓴 사람은 단위에 높이 앉아
인심과 더불어 도심을 강론하네

육곡 옥류동(六曲 玉流洞)
여섯 구비 초가집이 물굽이를 베고 누워
세상의 근심걱정 몇 겹으로 막았네
고고한 임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바람과 달만 남아 더없이 한가롭다.

칠곡 만월담(七曲 滿月潭)
일곱 구비 산 겹겹 돌 여울을 둘렀는데
이런 절경은 예전에 본적이 없네
산신령의 장난에 학이 놀라 깨어나니
솔잎에 맺힌 이슬 얼굴에 떨어져 차갑구나

팔곡 와룡암(八曲 臥龍巖)
여덟 구비 마음을 여니 눈앞이 활짝 열리고
흐르는 냇물은 다시 돌아 나오고
구름꽃과 새에 홀연히 빠져
오는 이 있고 없고 관여할 바 아니라네

구곡 용추(九曲 龍湫)
아홉 구비 고개 돌려 지난 일을 생각하니
내 마음 산천이 좋아 이러함이 아니로다.
오묘한 진리를 어이 말로 다하리오
이곳을 버려두고 어디 가서 물어야 하나
↑↑ 옥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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