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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종합

출향인 코너- 다시 가 본 한국민속촌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19.10.18 05:57 수정 2019.10.18 10:49

송재옥(전 성의중 교장, 탤런트 송윤아 아버지)

우리나라의 4대 명절(설 추석 한식 단오)중 하나인 추석, 신성한 둥근달에 소망을 빌어보는 가을 어귀 전통명절이다.
추석의 의미는 옛 농경사회에서의 봄여름 농사일의 결실을 거두는 수확기의 시작에서 맞이하는 매우 뜻 깊은 날이다. 이날이 오면 원근 혈연가족이 모여 조상님께 추수 감사제를 올리고 부모님과 함께 형제자매 온 가족이 명절을 즐긴다. 또한 잊고 지내던 고향의 친지 이웃에도 안부를 묻고 정을 새롭게 하는 명절이다.

고령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바는 없다. 매일같이 요동치며 가는 세월이라 할지라도 이날만은 행복한 한가위 명절로 오붓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 모처럼 모인 가족은 웃음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그러나 북적대던 분위기도 잠시이다. 넉넉한 명절이건만 돌아갈 여유에는 쫓긴다. 뿔뿔이 떠나간 뒷자리는 조용해진다. 또 다시 수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먼 훗날에 마음은 가 있다. 세월지킴이가 된 노부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일상의 공간을 차지한다.

명절 인사 전화 속에서 도시의 고딕 양식의 서구적 마을 맛이 아니라 옛 고향의 나직한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진 마을 한가위 명절의 향수가 가슴을 적시며 추억의 정을 떠올린다. 다음 날 한국 민속촌으로 발걸음을 맞추기로 끌어주었다.
길어진 밤은 지나고 새날이 밝았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어른에게도 모름지기 부푼 가슴이 일고 아랫도리는 덩달아 들썩인다.

길만 나서면 퀴퀴한 옛 생각이 교차한다. 한적한 옛 자갈길과 뻥 뚫린 아스팔트 길이다. 1940년대 1950년대에는 넓은 길이라곤 국도밖에 없었다. 그것도 자갈길이다. 하기야 사람, 소달구지, 가끔 자전거나 털털거리며 달리는 짐차뿐인 사회였으니까!
한국민속촌은 용인 방향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서울과 수원 용인은 하나로 연결된 도시인 듯하다.

한국민속촌 입구부터 주차장은 승용차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우리의 차는 안내를 받아 입구 끝자락에 세웠다.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지금은 국제적 관광환경으로 승화시킨 한국적인 고풍에 감탄과 자부심이 우리의 걸음을 재촉하였다. 대관문 앞에는 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동행한 부부와 함께 들어선 민속촌락은 흙벽돌 초가집들 흙먼지 날리는 담 사이 골목으로 시작된다. 기획된 조선시대 촌락의 이모저모를 재현해 놓은 것이지만 내가 실제로 살았던 것처럼 고향 농촌에 온 기분이다. 옛날 한적한 초가집 마을에 살았던 추억이 새롭다. 집이랑 마당 전부가 황토 일색이다. 잠시 소시절로 돌아온 듯하다.

내삼문 안쪽에 석인과 이정표를 보고 찾아간다. 우린 부드러운 흙길로 발길을 옮긴다. 선인들의 옛 생활상 앞에는 모여든 사람들이 인산인해였다. 6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옛 이조시대 생활문화 유산인 대장간, 짚신 삼는 모습, 유기그릇과 연초 담뱃대를 만드는 장인들의 모습은 바로 중부 남부 북부 할 것 없이 삼천리강산의 시대 역사이다.

나에게는 소년기에 이런 생활상이 모진 추억으로 녹아있다. 나도 모르게 오싹한 느낌이 일었다. 시계추가 7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연년이 이어지는 보릿고개 가난으로 몸부림치던 도농의 초라한 모습들이 떠오른다. 잠시 우울한 마음으로 애달픈 시절의 원망과 오늘의 문명사회의 풍요에 감사한 마음으로 다가서게 된다. 한편 ‘우리는 왜 일찍이 선진화된 나라처럼 개명하지 못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역사적인 성찰이 부족했거나 인색했다. 지금도 역사의식이 강한 그들은 외치고 또 외친다.
가운데로 흐르는 큰 개천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다. 그 중 중앙에 위치한 평석교를 걷는다. 개천에 푸른 물은 가득히 흘렀다. 물속의 잉어 떼들은 날쌘 활기와 잽싼 모습이었다. 또한 다리 위를 지나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기까지 한다.

다리 너머에는 옛 서당이 있었다. 서당건물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어 출입자를 통제하는 것 같았다. 대청마루와 넓은 방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처럼 아무나 글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양반층이나 선비들의 자녀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도 신분제도가 엄격했다. 양반 중인 상민 천민 등의 신분으로 지속되어 오다 조선 말기 갑오경장이 일어나면서 노비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계층에 따라 실제 생활에서는 일제를 거쳐 해방된 일정 기간까지도 이어왔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상이다.

이웃한 선비 집으로 들어섰다. 마당엔 아래윗방의 연결고리 꽃나무로 다소 소박하고 고즈넉한 기와집이다. 여기는 관광지인지라 전통 차와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외국인들이 전통 한복을 입고 한국의 민속생활을 체험하고자 관광의 참뜻에 젖어 있었다. 윷놀이, 제기차기, 연날리기, 강강술래놀이 등 민속놀이에 환한 웃음으로 한국인이 되어버린다. 한국인의 실생활에는 전통 한복 차림이 명절 외에는 극히 보기 드문 과거 생활 의상으로 현대의상과는 멀어져 있다.

제주도 민가와 울릉도 민가도 둘러보았다. 섬들의 토착적 특유의 집 구조와 지붕은 마치 옛 초막집 삶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집안 뜰마다, 거리마다, 옛 시골 장날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외국인들도 함께 즐긴다. 장터에도 들렸다. 젊은이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시장이다. 당시의 주된 생활 용기들이 많이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관심을 많이 끈 것은 먹거리 가게들이다. 떡집, 묵집, 파전집, 순대집, 막걸리집, 해장국밥집 등엔 관광객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외국인들도 전통 한식을 먹으려고 줄서기에 함께 하고 있었다. 영락없이 여기만큼은 다민족국가 먹거리시장 거리이다.

해방 이후 6·25 남침 전쟁 전후에는 외국인을 거리에서 귀하게 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토록 우리 사회는 닫혀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성공적인 산업화로 여유롭게 성숙한 문화인으로 세계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이다. 하지만 노년층은 참혹한 전쟁과 폐허 가난과 궁핍했던 과거를 잊을 수 없다. 오늘의 풍요로운 삶이 영원하도록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내일로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문화융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자들의 몫이다.

명절기에 즐거운 한때를 보내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구지 못하는 것은 분단된 남북이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로 갈등과 공포 전쟁의 참상으로 얼룩진 역사 위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동북아에서 항상 지정학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국제적 이해관계에 얽혀 늘 우리의 역량으로는 힘겨웠다.
평화를 염원하는 역사적 안목과 국력 신장에 정진해야 한다. 국제정세 변화에도 철저한 대비는 물론 국민적 지혜와 인내를 갖춰야 한다는 성찰의 시간도 함께 흐른다.
항상 준비해야 한다. 자유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가볼 곳이 너무도 많아 띄엄띄엄 건너 다시 개천을 지나 중부 지방민 농가와 남부 지방민 농가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당시의 양반층과 상민층의 생활상을 상상하면서 오늘의 윤택한 전 국민의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너무도 고마운 첨단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되었다.

야외 공연장은 여러 곳이 있었다. 농악놀이, 익살스런 버나 돌리기, 궁중의 춤 등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나 외국인들에겐 한국에서만이 볼 수 있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선물이다. 오랜 기억으로 남게 되는 장면들이었다.

또 한 곳에는 구경꾼이 산더미처럼 모여 박수를 쏟아내고 있었다. 여기 공연장은 마치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의 축소판 같은 곳으로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바닥에서 초록색 얼룩무늬를 한 태권도 사범들의 기교와 놀이에 관객들은 푹 빠져 있었다. 사범들의 묘기와 동작은 속도감을 탄 마술로 그 감동의 소리는 하늘을 뚫고 있었다.

하루해가 기울고 있었다. 다양한 식당 앞엔 요란했다. 남부지방 대가 길목 집으로 들어갔다. 한식이 주 메뉴이다. 메뉴별로 쿡 실이 별도로 되어 있어 깔끔한 음식으로 선정해 먹을 수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파전, 빈대 전, 족발, 수육, 막걸리 점심으로는 육개장, 비빔밥 후식으로는 다양한 과일 커피 등 넘치는 식탁으로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열린 홀 공간에는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았다. 외국인 가족들도 전통 한복을 입고 형형색색의 분위기로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보며 개천을 병풍 삼아 앉은 식탁의 서쪽은 산그늘이 건너쪽 산마루에 걸쳐 있었다. 이토록 여유로운 휴식으로 명절의 뒤풀이를 즐겼다.
관광객들이 서서히 빠져나간다. 우리 역시 대관문 안쪽 마당에 수호신처럼 우뚝 솟은 아름드리 물푸레나무를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립던 가족의 환희와 회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행복한 구속, 보람에 찬 가을의 단풍에 부푼 여운이 모두에게 새로운 사색과 생동감 있는 내일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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