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오피니언 칼럼

칼럼- 가황(歌皇) 나훈아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4.09.04 21:24 수정 2024.09.04 21:30

김선규(수필가․전 김천여고 교장)

 

지난해다. 추석 직전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공연 본 방송을 보지 못했다. 텔레비전 방송 뉴스를 보기 싫어 워낙 손이 가지 않던 채널이라 챙겨 보지 못했다.
 그의 신곡 ‘테스형’이 검색 순위 1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공연 후기가 연일 입에 오르내려 그가 한 말들이 언론에서나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시민들의 입에도 오르내렸다. 10년 넘어 나타난 모습이 얼마나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연휴 때 재방송 ‘나훈아 스페셜’을 놓치지 않고 보기로 작정했다.
 그는 진정 공연 예술가이다.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작사와 작곡한다. 그가 노래했던 1,200여 곡 가운데 800여 곡이 자작곡이다. 그의 노래에 그의 소질과 능력과 마음 깊숙이 자리한 감정이 녹아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대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이웃집 형처럼 테스형이라 부른 능청스러움 기발하다. 특히 노래 가사 중에 “그저 와 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는 가사에서 가수로서의 철학과 인생관을 드러낸다.

 요즘 트로트 스타들이 부르는 노래 한 소절이, 우리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다. 우리도 저마다 지닌 재능을 외롭고 고단한 이웃에게 보시(布施)하면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암울한 때, 가요 황제 나훈아가 출연료 한 푼 받지 않고 국민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용기를 북돋아 준 것에 감사한다.
 그간 한 말 중에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없다.” “KBS가 정말 국민을 위한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국민이 나훈아의 신선한 발언에 열광했다면 그건 메시지가 분명해서 크게 공감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했으면 하는 말을 오랜만에 가수가 던지자 나를 대신해주니 더더욱 폭발력이 컸다.

 가황 나훈아의 공연 후일담은 단연 뜨거운 감자다. 나훈아가 출연료를 받지 않은 이유는 “돈을 받으면 하라는 대로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 “제작비를 아끼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로 사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였는지도 모른다.
 60~70연대 라디오 시절의 초창기 그의 노래와 삶을 좋아한다. 그 당시의 목소리는 아주 풋풋하고 싱그러움이 묻어나 아주 맑다. 1969년 그의 데뷔곡 ‘천리길’이 좋다. 참 노래가 좋다. 정말 노래를 정말 잘한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이다.
 이제 그 청년이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76세의 노장(老將)이 되었다. 늙기 싫어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부르는 그의 노래에서 무거운 세월도 멀리 비켜 간다.

 그는 스케줄을 이유로 영광스러운(?) 북한 공연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부르면 황송해서 헐레벌떡 달려갈 줄 알았지만, "나, 바빠서 못 가." 더더욱 그를 높이 사게 하는 것은 훈장도 사양하고, "훈장을 받으면 그 값을 치러야 하니 그 무게를 못 버틴다."고도 했다.
 이런 일들로 미루어 너무나 당당한 자신감이다. 이것이 그의 개성이고 철학이다. 또한 “나는 흘러가는 노래(유행가)를 부르는 사람이니, 그냥 흘러갈 뿐 뭔가로 남는다는 건 웃기는 일이다.”라고도 했다.
 은퇴 계획을 묻는 말에 “내려올 시간과 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 방송국에서 이제 갑니다 할 것이니 이 이후 더 보이지 않으면 이제 힘이 다했나보다 아시면 된다”고 했다.

 

 우리나라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들이 다선을 무척 자랑스럽게 입에 오르내린다. 그것이 큰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공권력 앞에서도 “내가 몇 선 의원이다.”라며 큰소리치는 것이 방송을 탄다. 초선 의원을 대놓고 무시하는 “초선 의원이 말이야.”라며 꼰대짓하기도 한다. 한번 잡으면 도무지 내려놓을 줄 모른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일은 각자에게 주어진 짐인 고개를 하나 넘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필부인 우리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넘어야 할 산의 높이와 크기를 모른다.
 어떤 이는 동네 앞·뒷산처럼 아주 작고 낮아 별 볼일 없이 동산일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산이 가파르고 높고 커 험난한 태산준령일 수도 있다. 어쨌든 주어진 산을 더러는 웃으면서, 더러는 울면서 기어올라야 한다. 어디가 정상인지 모르고서라도.
 해는 이미 기울어지고 한참 전에 정상을 지났는데도 더 올라갈 데가 있는 줄 알고 계속 끙끙 기어오르려는 이가 많다. 그러나 다리의 힘이 조금씩 풀리고, 더 이상 속도가 나지 않으면 스스로 눈치를 채야 한다.
 ‘이제야 여기서 내려올 자리와 시간이구나!’ 깨닫고 행장을 챙겨, 미적거리거나 망설이지 말고 어서 내려와야 한다. 만일 더 꾸물대다가는 큰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 우리네 인생의 내려설 마무리의 시간을 알아채서 내려서야 한다.

 지금 우리는 오늘을 견뎌내는 격려와 용기가 요구된다. 나훈아는 그런 용기와 격려를 우리에게 보낸 것이라 생각이다. 아픔을 그 웃음에 묻고 내일이 두려운 일상이다. 우리도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고” 희망찬 내일을 바라보면 어떨까?
 내가 서 있는 여기가 어디쯤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소. 테스형!



저작권자 새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