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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김천의 숨은 이야기- 지례와 윤은보 서즐 정려각

권숙월 기자 입력 2024.01.31 15:11 수정 2024.01.31 15:23

‘예를 아는 고장’이라는 뜻을 담은 지례(知禮)
스승을 향한 지극한 효를 행한 윤은보와 서즐
세종대왕, 벼슬과 정려각 내려 모범사례로 칭송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 ‘삼강행실도’에 수록

역성혁성으로 집권한 조선은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표방하고 백성들에게 충효열(忠孝烈)로 대표되는 삼강(三綱)을 인간 윤리의 기본덕목으로 강조했다. 곧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부부간의 도리를 강조한 것이다. 국가가 이를 장려하고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삼강을 몸소 실천한 백성들 중에서 모범사례를 선발해 표창하고 각종 혜택을 제공했는데 이것이 정려각이다.
정려(旌閭)의 정(旌)은 천자나 임금이 백상들의 사기를 북돋우거나 신임의 증표로서 내리는 깃발을 말하며 려(閭)라는 것은 마을 입구나 길에 세운 문을 의미한다.
정려라는 것은 국가시책에 부합하는 백성이나 신하에 대해 나라에서 표창의 증표로 하사하는 오늘날의 훈장과 같은 것으로서 집과 같이 건물의 형태로 세우면 정려각, 문의 형태로 세우면 정려문이라 한다. 이러한 정려는 집의 문간채 대문 위에 행적을 기록한 나무판을 걸어두거나 별도의 문을 세우기도 하며 비석이나 나무판에 행적을 적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건물을 짓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행적의 사유에 따라 충절각, 효열각, 효자각, 열녀각, 열녀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따라서 정려란 충신, 효자, 열녀가 배출된 마을이나 집 입구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말한다. 정려를 받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사후에 후손이나 지역의 유림에서 예조에 신청을 하고 이것이 임금의 명으로 허락되면 그 증명서로서 ‘명정(命旌)’이 내려진다. 명정이란 임금이 명하는 정려라는 뜻으로서 부상으로 후손이나 배우자에게 세금과 군역이 면제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직이 수여되기도 했기 때문에 가문과 마을의 큰 영예로 여겨졌다.
정려가 주로 정려각의 형태로 마을 입구에 많이 세워진 것은 정려를 통해서 마을과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고려시대 말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정려각(문)은 충효열 즉 삼강(三綱)을 근본으로 삼은 유교가 국시로 전면에 등장한 조선시대에 들어 급속히 건립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정한 국가에서 유교의 핵심 덕목인 충, 효, 열을 백성들에게 장려하고자 모범을 보인 백성들의 사례를 정려라는 형태의 시각적인 표창 상징을 통해 본을 받게 하고 이를 통해 이상적인 유교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김천지역에도 22개소의 정려각이 내려졌는데 이 중에서 지례면 교리 윤은보 서즐 정려각은 지역 최초의 정려각인 동시에 부모가 아닌 스승에 대한 효행이라는 특이한 사례이다. 이는 임금과 스승, 부모의 은혜는 동일하다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로서 백성들의 필독서로 권장하기위해 세종대왕의 특명으로 제작, 배포된 ‘삼강행실도’에 ‘은보감오’라는 제목으로 수록돼 예를 아는 고장, 지례(知禮)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편집자 주>

윤은보 서즐 정려각
윤은보 서즐 정려각
▲윤은보 서즐 정려각 1
윤은보 서즐 정려각은 지례면 교리 마을 입구에 자리한 김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정려각으로 고려말 향리로 낙향해 후학을 양성한 장지도와 윤은보, 서즐 등 사제지간인 세 사람의 효행이 담긴 정려각이다.
정려각 옆으로는 “張盤谷尹節孝徐南溪三先生遺墟碑(장반곡윤절효서남계삼선생유허비)”라 새겨진 비석이 있다.
장지도는 옥산장씨로 수원부원군 장을포(張乙浦)의 손자로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 지례 거물리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한 후 고려조정에서 기거주지의주사(起居注知宜州事), 조선 건국 초에 종4품의 소감(少監)직에 올랐으나 태종 조에 이르러 골육상잔의 참극을 목격한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낙향 후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시가 전한다.
“천년 반곡은 평평한 방안 같고 깎아지른 앞산은 석성을 이루었네. 예부터 몇 집이나 대를 이어 살아왔던가? 오늘에 이르러 열 집이나 관직을 얻었네. 처마 밑 드리운 감과 밤은 산중의 진미요, 문에 걸린 구름은 세상의 인정을 잊게 하네. 출세하다 버림받음을 원망하지 마라. 편안하고 한가한 손님이 자연과 친구가 되었지 않은가.”
이 시를 통해서 볼 때 장지도는 조선왕조에 종사할 뜻이 없으며 과감히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낙향해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겠다는 불사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장지도는 향리인 거물리 반곡(바람실)에 서당을 열고 제자들을 길러내 지례현의 향풍을 쇄신하고 문풍을 진작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제자들 중에서 윤은보(尹殷保)와 서즐(徐騭)의 학문이 출중했는데 두 사람은 아들이 없는 스승 장지도를 위해 어버이의 예로서 봉양해 훗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은보감오(殷保感烏)’라는 제목으로 그 효의 행적이 수록돼 지례의 명성을 드높인다.
다음은 ‘삼강행실도’에 실린 장지도와 윤은보, 서즐의 행적이다.
知禮縣人尹殷保, 徐騭, 俱學於同縣知宜州事張祉, 一日相謂曰,“人生於三, 事之如一, 況吾師無子可養乎?” 得異味輒饋 每遇良辰, 必具酒饌, 如事父然. 張沒, 二人請廬墓於其親, 親憐而聽之. 乃玄冠腰絰, 居墓傍. 躬爨供奠, 尹父嘗病, 卽歸奉藥, 依不解帶, 父愈, 令復師廬. 月餘尹感異夢, 亟歸則父果異夢夕病作, 未旬而死. 尹晨夕號哭, 不離喪側, 旣葬, 廬父墳. 一日飄風暴起, 失案上香盒, 數月有烏銜物, 飛來置塋前, 人就視之, 卽所失案上盒也. 至朔望酋奠張墳, 徐終三年, 宣德壬子, 事聞, 殷保 騭, 竝命旌門拜官
(번역)지례현의 윤은보와 서즐은 같은 고을 지의주사벼슬을 한 장지도에게 배웠다. 하루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람으로 태어나 임금과 어버이와 스승은 섬기기를 하나같이 하라 했는데 우리 스승이 아들이 없으니 우리가 봉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문득 맛있는 것이 생기면 스승에게 먼저 드리고 명절이면 술과 반찬을 준비해 어버이와 같이 섬겼다. 장지도가 돌아가시자 두 사람은 아버지에게 여묘살이 할 것을 청하니 아버지는 가련하게 여겨 허락했다. 이내 상복을 입고 묘 옆에서 살면서 몸소 음식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윤은보의 아버지가 병이 드니 곧 돌아가 약을 올렸는데 이때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한달여가 지나서 윤은보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급히 집에 돌아가 보니 아버지가 병이 들어 열흘이 되지 않아 별세했다. 윤은보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곡을 하면서 한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후 아버지 무덤에 여막을 지었다. 하루는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더니 향로가 날라 갔다. 몇 개월 뒤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날아와 무덤 앞에 두었는데 살펴보니 잃어버린 향합이었다. 삭망이 돼 장지도는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서즐도 3년상을 마쳤다.

장지도 묘소
장지도 묘소
▲ 장지도 묘소 2
1432년에 이 일이 세상에 알려져 윤은보와 서즐에게 정려와 벼슬이 내렸다.
남계 서즐은 이천서씨로 고려 성종때 거란의 침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과의 담판으로 거란군을 철수케 하고 강동6주를 회복하는데 기여한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의 11대손이며 원주판관을 역임한 서강(徐强)과 양천허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지례현 거물리에서 태어나 자를 덕의(德以), 호를 남계(南溪)라 했다.
서즐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조선 건국초기 지례로 낙향한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의 제자가 돼 절효(節孝) 윤은뵤(尹殷保)와 함께 아들이 없는 스승을 위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한 행적이 ‘삼강행실도’에 등재되면서 널리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다.
‘삼강행실도’는 1428년 (세종10년) 진주의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세종은 삼강(三綱) 즉,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 효자, 열녀를 각각 35명씩 가려 뽑아 모두 105명의 행적을 소개하고 당대의 이름난 화가인 안견(安堅)과 최경(崔涇)으로 하여금 그림으로 그리게 해서 1436년(세종18) 편찬한 교훈서이다.

윤은보 묘소
윤은보 묘소
▲윤은보 묘소 3


서즐 묘소
서즐 묘소
▲서즐 묘소 4
특히 효행을 기록한 35편 중 31편이 중국의 사례이고 4편만이 우리나라의 이야기인데 이 가운데 ‘은보감오(殷保感烏)’ 즉 ‘은보가 까마귀를 감동시키다’라는 제목으로 서즐과 윤은보의 행적이 수록되니 지례고을이 명실공히 예향(禮鄕)으로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삼강행실도’에 따르면 “지례현의 윤은보와 서즐이 장지도에게 배웠는데 임금과 어버이와 스승을 하나같이 섬기기로 결의하고 성심껏 모셨고 그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함께 시묘살이를 했다. 그 도중에 윤은보가 부친상을 당해 여막을 지키다가 회오리바람이 불어 날아갔던 향로를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이적이 일어났는데 스승을 어버이와 같이 섬기고 예를 다한 윤은보와 서즐에게 1432년(세종14)정려문과 벼슬을 내렸다”라고 기록돼 있다.
스승인 장지도 선생과 제자인 윤은보, 서즐 등 세분을 기리는 삼효정려각(三孝旌閭閣)과 삼선생유허비(三先生遺墟碑)가 지례면 교동 옛 도로변에 나란히 섰고 대덕면 조룡리 섬계서원 동별묘에 세분이 함께 배향됐다.
세종대왕은 1426년 진주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사건이 발생하자 충효열(忠孝烈) 즉 삼강(三綱)을 바로 잡기위해 설순과 안견으로 하여금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 효자, 열녀의 사례를 연구해 백성교화서를 발간하게 하니 이것이 곧 ‘삼강행실도’이다. 모두 105편의 사례가 실렸는데 이중 우리나라 최고의 효행 사례 4건 중에 윤은보와 서즐의 행적이 실렸던 것이다. 윤은보의 묘비(坡平尹公殷保墓碑)에 다음과 같은 시가 기록돼있다. 孔門廬墓載遺篇 공문(孔門)의 여묘(廬墓)살이 남겨진 글에 실렸으나 師道千年癈不傳 스승의 도(道) 천년토록 병들어 전해지지 않았었네 誰料窮鄕初學輩 궁벽(窮僻)한 시골의 처음 배우는 이가 누가 알리 種楷腰經企前賢 성인(聖人) 가르침 실천하여 법 심으며 앞 현인(賢人)처럼 되길 바랄 줄을 一軆而分性本眞 한 몸에서 나누어졌으나 성품은 본래 진실해 夢驚親癠氣通神 어버이 병환에 꿈에도 놀라니 기운이 신묘(神妙)하게 통했네 慈烏反哺能相感 반포(反哺)하는 까마귀도 능히 감동(感動)되어 香合啣來慰棘人 향합(香合) 물고 와 상주(喪主)를 위로하네 세종대왕은 1432년(세종14년) 두 사람에게 정려와 벼슬을 내렸는데 김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정려각으로서 지금도 지례면 교리 마을 입구에 자랑스럽게 서 있다. 두 사람의 행적으로 인해 ‘예를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고을’이라는 뜻을 가진 지례(知禮)의 명성이 전국에 알려진 계기가 됐다.

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5

<김천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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