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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2024년 갑진년 용의 해 특집- 김천의 용(龍) 이야기

권숙월 기자 입력 2024.01.17 13:09 수정 2024.01.17 13:39

희망에 찬 2014년 새해가 밝았다. 특별히 금년은 열두 띠를 상징하는 십이지(十二支) 가운데서 다섯 번째 동물인 용의 해인지라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로부터 용은 권위와 풍요, 신비로움을 상징한다고 우리 조상들은 용을 신령스러운 상상의 동물로 숭상해왔기에 새해에 갖는 기대가 더욱 각별하다 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마을 터나 집터, 묘터를 선정하는 기준이라 할 수 있는 풍수지리상으로 용과 관련된 일화와 전설, 지명이 우리 고장 곳곳에 남아있다. 2024년 용의 해를 맞아 김천과 용에 얽힌 이야기 속으로 떠나보자. <편집자 주>

경북선 철도 부설로 용의 꼬리가 잘린 신음동 부거리
신음동 달봉산 아래 직지천변을 마주하고 자리잡은 부거리는 이 고장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많이 살아 클 거(巨) 부자 부(富)자를 써서 부거리라 했다. 전하기를 이 마을에 부자가 많은 이유가 뒷산인 달봉산은 풍수지리로 볼 때 청룡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 부거리를 감싸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24년 김천역에서 상주 방면으로 경북선 철도가 이 마을 앞을 지나면서 웅크리고 있는 용의 꼬리라 해서 이름 붙여진 청룡바위를 잘라버리고 말았다.
마을 어른들은 이때부터 용의 기운이 쇠해 마을의 부자들이 타처로 떠나고 말았다며 한탄을 했다고 입을 모은다. 2000년대 초까지도 비록 잘리기는 했지만 이 청룡바위가 철로 변에 남아있었는데 부거리 방면으로 도로가 확장되고 상가가 건립되면서 청룡바위는 사라지고 말았다.

▲청룡꼬리 

감천을 향해 달려가는 용머리 언덕이 있었던 용두동
용두동은 옛 김천장이 있었던 조선시대 후기 이 고장의 대표적인 상권으로 어른들은 용우머리로 불렀다.
용두 또는 용무머리는 원래 현재의 한신아파트 옆 철로변 일대의 모래언덕 이름이었는데 그 형상이 흡사 용이 머리를 들고 감천을 향해 달려가는 형상이라 해서 용의머리라 한 것이 음이 변해 용우머리라 했고 한자로 용 용(龍) 머리 두(頭)자를 써서 용두동이라 불리게 됐다.
▲용두동 

용의 머리를 닮은 바위가 있는 조마면 신왕리 용바우마을
조마면 신왕리는 박리, 수왕, 용바우, 송정, 신계 등 다섯 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이중 용바우마을이 용과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지는 마을이다.
이 마을 앞 하천에 용의 머리 형상을 한 큰 바위가 솟아있어 용 용(龍) 바위 암(岩)자를 따서 용암이라 적고 우리말로 용바우라 불렀다. 이 용머리바위를 따라 마을 뒤로 길게 용의 몸통처럼 야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 예로부터 마을 주민들은 용의 정기가 마을을 지켜준다는 믿음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용바우라 하고 이 바위에서 뒷산으로 연결되는 동선을 따라 도로포장을 할 때도 용의 몸에 시멘트를 바르면 안 된다고 도로포장조차 거부했을만치 용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용바우 

용이 승천했다는 바위가 마을지명이 된 농소면 용암리
씰미, 수페, 대방 등으로 이뤄진 농소면 용암리는 용과 관련된 씰미마을의 전설로 인해 마을의 이름이 유래됐다.
김해김씨 판서공파 입향조인 김용배가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꿈을 꾸었는데 마을 뒷산에 있는 골짜기 웃골의 큰 바위 위로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용바위라 불렀고 한자로 용 용(龍) 바위 암(岩)자를 써서 용암이라 했다.

▲용바위 

용꿈이 용밭, 우래, 종상이라는 지명이 된 남면 용전리와 운남리
혁신도시 건설로 폐동이 된 남면 용전리 용밭마을과 우래마을, 마을의 일부가 편입된 운남리 종상골은 모두 용과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로 인해 지명이 생긴 마을들이다.
용밭은 밀양박씨 복사공파 집성촌으로 입향조 박수언이 처음 들어와 마을을 개척할 때 뒷밭에서 용이 솟아오르는 꿈을 꾼 후 용 용(龍) 밭 전(田)자를 써서 용전이라 적고 용밭이라 불렀다. 그 용이 운남산의 구름을 타고 승천하기 위해 따라 올라갔다는 마을이 지금의 종상골로 따를 종(從) 윗 상(上)이 여기서 유래됐으며 승천할 때 벼락이 치며 큰 소리가 났다해서 용밭마을 옆에 천둥을 뜻하는 우레, 또는 우뢰(雨雷)라는 지명의 생겼는데 후에 우래(友來)로 바뀌었다. 마을이 폐동이 된 후 일부 주민들이 인근으로 집단 이주를 할 때 용과 관련된 이러한 신비로운 전설이 담긴 지명을 고수하기 위해 마을이름을 그대로 용밭으로 삼기도 했다.

▲용밭마을 

다섯 마리 용이 달려든다는 개령면 신룡리 오룡골
곰내기와 오룡골 두 마을로 이루어진 개령면 신룡리는 오룡골 마을에 풍수지리와 용에 얽힌 사연 때문에 오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삼각형태의 저수지가 있는데 마을 앞뒤에 포진한 산줄기가 저수지를 향해 뻗어 내려 이 다섯 산들이 용의 형상을 닮았다 해서 다섯 오(五) 용 용(龍)자를 따서 오룡골이라 했다는 것이다.

▲오룡골 저수지 

용이 엎드려 있다는 대항면 대룡리 용복마을
대항면 대룡리는 반곡, 행정, 용복 세 마을로 이뤄져있는데 용복과 반곡마을이 용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마을 뒤 덕대산 자락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는 오룡산이 있다. 그 여의주를 상징하는 바위 다섯 개가 마을 앞 여의밭골에 있었는데 1975년 경지정리 과정에서 땅에 묻히고 말았다는 것.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을 청년회에서 1989년 덕대산에서 자연석을 골라 마을 앞에 오룡주(五龍珠)라는 이름으로 세워 놓았다. 또 이웃한 용복마을은 대룡리 속한 마을 중 용복마을은 마을 중앙에 흡사 용이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야산이 있다고 용 용(龍) 엎드릴 복(伏)자를 써서 용복이라 했는데 1970년대 공장을 지으면서 이 산은 사라지고 없다.
▲오룡주


용이 늪으로 들어간다는 감천면 도평리 소용골마을
감천면 도평리는 소용골, 평산, 후평, 도촌 등 네 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이 중에서 소용골(시용골) 마을이 용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이 마을 앞은 개간하기 전까지 감천에 인접하고 지대가 낮아 늘 물에 잠겨 늪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뒷산인 숫돌봉은 풍수지리로 볼 때 용의 형세인지라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긴 제방을 따라 마을 앞 늪으로 가는 모양이 용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듯 하다고 마을 이름을 늪 소(沼) 용 용(龍)자를 써서 소용골이라 했는데 세월이 흘러 사람들은 시용골이라고 불렀다.

▲소용골 


마을 뒷산이 용이 엎드려 있는 형상인 구성면 용호리 와룡마을
구성면 용호리는 하복호, 상복호, 각골, 와룡 등 네 마을로 이뤄져 있다. 용호(龍虎)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마을은 주변 산세가 풍수지리에서 대표적으로 언급하는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와 그 형세가 막상막하일 때 표현하는 용호상박(龍虎相搏)이 연상될 만치 위풍당당한 지세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와룡마을의 지세는 용이 맞은편 호랑이를 노려보며 웅크리고 있는 듯해 엎드릴 와(臥) 용 용(龍)자를 써서 와룡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와룡마을 

용이 승천했다는 증산면 수도리 용소폭포
용소폭포(용추폭포)는 증산면 수도리 수도암 오르는 도로변의 수도계곡의 끝자락에 있는 김천지역 최대규모의 폭포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폭포 아래 물동이는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이고 떨어지는 물소리가 용이 승천하는 굉음 같아 용 용(龍) 늪 소(沼) 또는 용 용(龍) 떨어질 추(墜)자를 써서 용소, 용추폭포라 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예학을 집대성한 한강 정구 선생은 수도계곡의 절경지 아홉 곳을 찾아다니며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지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따 무흘구곡(武屹九曲)이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용소폭포 

명당 산소와 용바위 전설이 전하는 증산면 부항리 이전마을 양푼소
월섬, 한적골, 감나무골, 새마, 이전 등 네 마을로 구성된 증산면 부항리는 아흔아홉 구비로 불리는 고갯마루 너머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가운데 이전마을 양푼소로 불리는 계곡에 용바위와 산소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이 마을에 살던 전씨 성을 가진 한 집안에서 초상을 당했는데 지관이 용밭걸 양푼소 위쪽이 명당이라고 안장을 한 이후 큰 부자가 됐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 마을 안쪽 황항리로 들어가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바위의 일부를 깨트렸는데 갑자기 용의 형상을 한 말이 바위에서 나와 울면서 날아갔다고 한다.
이후에 이 부자는 마을을 떠나고 산소는 방치됐는데 사람들은 용이 승천하는 명당의 혈자리를 몰라보고 잘랐기 때문이라고들 했다고 한다.

▲양푼소 용바위 

청룡이 앉아있다는 농소면 월곡리 용시마을 삼태봉
농소면 월곡리로 속하는 마을 중에서 용시(용소)마을은 앞들의 대부분이 혁신도시 부지로 편입돼 옛 시골마을의 면모가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 뒤에는 삼태봉이라는 야산이 있는데 이 산은 풍수지리설로 볼 때 청룡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형세여서 지명을 용 용(龍)자에 장소를 뜻하는 바 소(所)자를 써서 용소라 불렀고 훗날 음이 변해 용시라고도 했다. 지역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이같은 전설을 믿으며 삼태봉은 용의 신체이므로 묘지, 벌목, 토사 채취 등을 엄격히 금해왔다. 또 삼태봉에서 신촌 방향으로 연결되는 도로변을 용꼬리라고 부르며 1930년대까지 매년 흙을 쌓아 꼬리형상의 둔덕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용의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용이 승천하는 명당터에 자리잡은 남면 운곡리 등골마을
남면 운곡리 등골(둔골)마을은 장흥위씨 부장공파 집성촌으로 입향조 위대홍 장군이 관직에서 퇴임 후 자리를 잡은 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장군은 평소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었다고 하며 은거지를 찾던 중 마을 앞산인 운남산이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임을 간파하고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등골마을 

여덟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팔용샘이 있는 개령면 남전리 남밭마을
개령면 남전리는 남밭과 대양묘, 못안 등 세 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이 중 남밭마을 뒷산의 샘이 용과 관련이 있다. 이 샘은 여덟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팔용샘이라 불렸으며 이러한 이유로 30년 전까지 매년 마을 동제를 지냈던 제단이었다. 풍수지리설로 볼 때 팔용샘의 물은 마을 입구의 남밭저수지와 연결되고 또 대양묘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용정고개로 이어져 용의 우물이라는 용정(龍井)을 만들었다고 한다.

▲용정 

용이 물을 먹었다는 용왕골과 청룡산이 있는 감문면 삼성리
감문면 삼성리 외삼봉마을 왜퇴산과 삼봉마을 청룡산에는 용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왜퇴산에는 용이 내려와 물을 먹고 갔다는 용왕골이 있어서 가뭄이 심한 해에는 주민들이 모여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인근의 청룡산은 삼봉마을 뒷산인 삼밭골로부터 둔들마까지 야트막한 야산이 길게 뻗어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용과 같아서 청룡산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신성한 용의 등이나 목을 넘어 다닐 수 없다고 해서 지름길임에도 불구하고 청룡산을 우회해 돌아다녔다고 전해진다.

▲청룡산 

                                                                                                                                           <김천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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