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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종합

칼럼- 달과 우리 민족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1.01.29 14:07 수정 2021.01.29 16:34

안정기(전 고령교육장)

설을 쉰 후 맞이하는 정월 대보름은 15일째 되는 날이다. 지금의 어린이들에게는 별 관심 밖의 날이지만 오십대 이상에게는 이날에 대한 각종 풍습들이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새벽부터 더위를 팔기 위해 친구들 이름을 부르며 온 동네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귀가 밝아지는 술을 마시고 각종 강정을 먹으면서 부스럼을 예방했고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새끼를 태워 담장 위에 걸쳐놓기도 했다. 하루 종일 찹쌀로 지은 밥을 먹고 산나물을 먹는 등 일종의 미신에 불과한 일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이날의 절정은 오후에 온 마을 주민 전체가 뒷산에 올라가 나무를 준비하여 달맞이 불을 지르는 일이다.

새해를 맞아 처음 솟아오르는 보름달을 남보다 먼저 발견하여 본인들의 소원 성취를 기원한다든지 젖은 나무를 태워 많은 연기로 달을 그으러 그해의 풍년을 비는 풍속 등이 달과 관련되어 왔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달과 끈끈한 인연을 맺어 왔다. 농사를 본업으로 했던 우리 민족이었기에 농사의 시작부터 마침까지의 모든 과정을 달이 차고 기우는 것에 맞춰 오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는가 싶다.

서양에서는 달보다는 태양에 더 비중을 둔다. ‘오 솔레미오’에서 보는 것처럼 애인이나 생명을 말할 경우 그들은 서슴없이 ‘오 나의 태양’이라 할 만큼 태양 쪽이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노래나 이야기의 대부분이 달과 관련되어 있다. 온 천하가 환하게 보이는 태양보다는 약간은 숨겨져서 은은히 수줍어 숨는 듯한 달빛을 더 좋아해 왔으니 말이다.

선비들 앞에서 기녀들은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노송의 휘굽은 가지에 걸린 달을 바라보며 거문고를 뜯었고 선비 또한 답례로 달과 더불어 한 수 시조를 읊으며 술에 취하고 미(美)에 취하며 나아가서는 달에 취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백제의 유일한 가요 ‘정읍사’를 보면 “달하! 노피곰 도샤 머리곰 비취오시라”로 시작, 절대적 존재인 달에게 장사 나간 남편의 무사 귀가를 기원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이덕형은 “달이 두렷하여 碧空에 걸려시니 萬石風霜에 려점즉 하다마는 至今 이 醉客을 爲하여 長照 金樽하노매”라고 노래하여 달 밝은 밤에 술통을 앞에 놓고 얼큰한 기분으로 달에게 말을 거는 풍류 또한 달빛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아무리 가난해도 달을 쳐다볼 때만은 신선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으며 달 없는 생활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디 어른들뿐이었겠는가? 아이들 또한 경이에 찬 눈으로 달을 바라본다. 계수나무 아래 옥토끼가 떡방아 찧는 노래가 아니더라도 은하수를 건너는 조각배엔 푸른 달빛이 가득했으니 어릴 때 청운의 꿈을 달에서 키워 왔다. 남녀노소 없이 달을 무조건 좋아하면서 소박하게 살아왔다. 24절기 또한 달을 중심으로 하여 세시풍속이 이어져 왔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정월 대보름날 답교(踏橋)의 풍습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고 했던 추석의 풍요로움도 달과 함께 했다.
특히 답교 행사는 조선 중종 때부터 있었던 풍습으로 하늘의 큰 보름달을 쳐다보면서 자기 나이만큼 다리를 밟으며 왕복했던 것인데 이렇게 하여 재난을 피함은 물론 또한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바깥출입이 통제되었던 그 시절의 젊은 아녀자는 말할 것도 없고 청춘남녀에게 이날만은 허락된 만남의 광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장시간 분홍빛 말장난과 함께 만끽하면서 살며시 연인의 손목을 잡아볼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물론 이날은 쾌청한 달보다는 옅은 구름이 살짝 달빛을 가리면 금상첨화(錦上添花)였다. 달이 있고 임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낭만과 소망의 상징으로 존재했던 달만은 아니었다.

한(恨)과 애수와 눈물의 달이기도 했다. ‘강강수월래’가 그것이다. “등잔 등잔 옥등잔에 강강수월래”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시집살이하던 여인이 밤새 등잔불 아래 바느질을 해도 “불 끄고 그만 자라”는 사람이 없어 문풍지 바람이 불을 꺼주고 여인은 지쳐 잠이 들었는데 늦게 돌아온 남편에게 시어머니가 바느질 핑계삼아 잠만 잔다고 고자질을 하여 남편에게 심한 꾸중을 들은 여인은 너무 억울하여 은장도로 자기 가슴을 찔러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노래한 것인데 이것 역시 달빛 아래 집단적으로 노래를 부름으로써 여인의 한을 달랬던 것이다.

이렇듯 달은 늘 우리 민족과 함께해 왔는데 오늘날은 현대 과학문명에 밀려 언제 달이 뜨고 언제 달이 지는지조차도 모르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대낮같이 밝은 가로등 저 멀리 희미한 달빛은 힘을 잃고 겨우 나뭇가지에 걸려 명맥을 이어갈 뿐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머잖아 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전설로만 남게 될 것 같아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분명 양력보다는 음력, 해보다는 달, 햇빛보다는 달빛이 우리 민족 정서에 더 잘 어울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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