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특집 기획기사

기획특집- 여름에 가볼만한 김천의 명소<2>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0.08.04 19:35 수정 2020.08.04 19:36

방초정(芳草亭)
정절을 지키기 위해 투신한 아내를 위한 사랑의 증표
부인의 절개를 닮은 붉은 배롱나무 꽃과 어울려 장관


지루한 장마도 끝이 나고 바야흐로 삼복더위가 계속되고 있는 요즘이다. 여름하면 떠오르는 건축물로는 높다랗게 돋아 세워 경관을 감상하고 시인묵객들을 접대하던 정자가 떠오른다. 김천지역 정자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그 규모또한 웅장하며 빼어난 건축양식과 함께 세워진 가슴 아픈 절절한 사랑이야기가 담긴 방초정이 으뜸으로 꼽힌다.

방초정은 연안이씨(정양공) 집성촌인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로 1625년(인조3) 방초(芳草) 이정복(李廷馥)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자신의 호(號)를 따 건립한 정자로 지난해 말 김천지역 정자로는 유일하게 보물 제 2047호로 지정됐다.

1689년 훼손된 것을 이정복의 손자 이해(李垓)가 중건하고 1727년에 다시 보수했으나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난(무신란)때 방화로 일부 소실됐다.
1736년 홍수로 감천이 범람하면서 유실된 것을 1788년 후손 이의조(李宜朝)가 수해로부터 안전하도록 지금의 위치로 옮겨 중수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주심포계 이익공 팔작지붕 양식으로 1974년 12월 1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됐다.
2층 누각 가운데 1칸 크기의 온돌방을 두고서 사방으로 분합문을 달았는데 중앙의 온돌방 사면은 벽체가 없이 모두 창호를 바른 분합문으로 구성돼 있다.

여름에는 문을 들어 올려 걸쇠에 걸고 겨울에는 문을 내리고 방 아래에 설치한 아궁이에 난방을 해 계절에 관계없이 정자를 활용할 수 있도록 활용성을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
화강암으로 된 2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온돌방을 구성하고 있는 누상주 중앙의 사모기둥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주를 세웠는데 누하주의 경우 원목의 껍질만 벗기고 거의 가공을 하지 않은 도랑주에 가깝다.

특히 규모가 있는 정자임에도 일체의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白骨宅)인 점도 특이하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지붕의 추녀를 받치기 위해 방형 활주초석 위에 원형 활주를 세웠다.

우물마루의 가장자리 사면에 설치된 난간은 치마널과 난간상방, 하방, 청판, 계자다리, 하엽, 난간대로 이뤄진 전형적인 계자난간(鷄子欄干)이며 난간청판에 구름문양의 풍혈(風穴)을 냈다.

누상주의 기둥머리에는 주두(柱頭)를 얹고 운공형 살미를 냈는데 창방과 납도리, 장혀 사이에 꽃살이 새겨진 원형화반을 끼웠다.
천장은 양 가장자리에 우물형의 눈썹천장을 달아 서까래와 추녀뿌리가 노출되는 것을 가렸다. 방초정 우측에는 이정복 처 화순최씨 정려각과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가 있다.

방초정의 건립과 관련해서 감춰진 젊은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 이정복(당시 17세)이 양천동 하로마을 화순최씨 부인(당시 16세)에게 장가를 들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더라도 시댁에 가서 죽겠다며 신행길을 나섰다가 시댁마을에 들이닥친 왜병을 만났고 능욕을 당할 지경에 이르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마을 앞 웅덩이에 투신했다.
이때 부인을 따라온 하녀 석이(石伊)도 부인을 구하려고 연못에 뛰어들었다가 함께 빠져죽었다.
어린 신부를 잃은 이정복은 부인을 그리워하며 여러 해 동안 웅덩이를 떠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후사를 이어야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재혼을 하면서 부인이 투신한 웅덩이를 확장해 ‘최씨부인의 연못’이라는 뜻의 최씨담(崔氏潭)이라 이름 지었다.

연못 옆에 자신의 호(號)를 딴 방초정을 지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부부의 인연을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기원했다.
비록 몸은 떠나지만 절개를 지키기 위해 먼저 간 어린 부인에 대한 사랑의 증표로서 방초정과 최씨담을 함께 세운 것이다.
훗날 지역 유림에서 최씨부인의 열행을 조정에 알리니 1632년 인조임금은 어필 정려문을 내렸고 부인의 정려각이 세워졌다.


<화순최씨 정려각>

1975년 최씨담 연못 준설 공사 도중에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라 새겨진 작은 비석이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충노석이지비>
상전이었던 화순최씨 부인을 구하기 위해 웅덩이에 뛰어들었던 여종 석이의 비석으로 전설처럼 떠돌던 비석의 존재가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석이의 비석은 동민들에 의해 380여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주인인 부인의 정려각 앞에 세워졌다.

주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한 노비의 충성심에 감복한 연안이씨문중에서 비석을 제작했으나 반상(班常)의 신분이 엄격했던 당시의 사정상 차마 노상에 세우지는 못하고 연못에 던져주었던 것이다.
최씨담의 중앙에는 섬을 두 개 배치했고 가장자리에 땅버들나무와 배롱나무를 심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같은 정원형태는 조선시대 사대부 집성촌의 정자와 연못 조경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 독창적인 건축양식은 김천지방의 대표적인 정자인 만취정, 모성정, 무송정, 쌍호정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방초정 현판은 김대문(김대만)이 썼고 정자 내부의 기둥에는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한 시가 붙어 있는데 특히 방초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각 방면의 절경을 노래한 ‘방초정십경(芳草亭十景)’이 유명하다.

芳草亭 十景

<一帶鑑湖>
檻外鑑湖一帶流 난간 밖 감호일대가 흐르니
明沙白石短長洲 맑은 모래 흰 돌 길고 짧은 물가로다
桃花氣暖春風靜 도화 기운 따뜻한데 봄바람도 고요하니
時有漁郞係片舟 때때로 고기잡이 조각배를 매누나

<十里長亭>
街頭孤立一長亭 길가 큰 정자 하나 외로이 서 있으니
不語能知遠近程 말하지 않아도 능히 멀고 가까운 里程을 알리로다
此去王城凡幾里 여기서 왕성이 무릇 몇 리나 되나
行人到此或驂停 행인이 혹 갈 길을 멈추는구나

<金烏朝雲>
金烏山上起朝雲 금오산 위 아침 해 솟으니
如火如綿自動雯 불인 듯 솜인 듯 스스로 문체가 움직이는구나
莫道人間引雨氣 인간이 우기를 끈다 말하지 마라
玉樓高處降仙君 옥루 높은 곳에 신선이 내려 왔나니

<修道暮雪>
山深修道雪添寒 산은 수도산이 깊고 눈은 추위를 더하는데
千樹梨花入遠看 자욱한 배꽃이 멀리 들어와 보이는구나
唱作郢門歌一曲 영문에 노래 한 곡 지어 부르니
陽春和氣自成團 양춘의 따사로운 기운이 스스로 둥글구나

<螺潭漁火>
漁火螺潭竟夜明 올뱅이 도랑에 고기잡이 불 밤새도록 밝으니
鴈鴻疑月落沙平 기러기가 달인가 의심하고 모래밭에 떨어지는구나
歸時人問江南景 돌아갈 때 사람들이 강남 경치 묻거든
芳草高亭最有名 방초 높은 정자 가장 유명하다고 하여라

<牛坪牧笛>
亂來牧笛起牛坪 어지러운 목동의 피리소리 우평에서 일어나니
故使遊人午夢驚 짐짓 유인으로 하여금 낮잠을 깨우는구나
背上誰家髧髮子 소등에 뉘 집 댕기머리 총각이
時時雜送讀書聲 때때로 글 읽는 소리를 섞어 보내는고

<窟臺丹楓>
葉葉臺前丹落楓 잎새마다 대 앞에 붉게 떨어지는 단풍잎
秋容恍惚畵圖中 가을 모습 그림 속이로다.
有何門外停車客 문 밖에 어떤 수레 멈춘 길손이
坐愛春花二月紅 앉아서 二月의 봄꽃보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느뇨

<松岑翠林>
東立松岑積翠林 쫑긋 솟은 송잠에 푸른 숲이 가득하니
四時春色永傳今 사시의 봄빛이 길이 지금까지 전하누나
禽聲上下滁亭樂 새소리 오르락내리락 제정의 즐거움이
此地移來入我吟 이 땅에 옮겨와 나의 읊음에 들어오는구나


<鷹峰落照>
遙看落照下鷹峰 멀리 낙조가 응봉에 내리는 모습
村掩柴扉寺撞鐘 마을에서는 사립문을 닫고 절에서는 종을 치는구나
齊景牛山空下淚 옛날 제경공이 牛山에서 눈물을 흘렸다니
朝陽對處更何容 아침 빛 대하는 곳에서는 무슨 얼굴 지을라느뇨

<眉山半輪>
仰見眉山月半輪 미산에 조각달 우러러보니
姮娥猶不露全身 항아가 아직 전신을 드러내지 않았구나
第當生魄中天到 생백을 기다려 중천에 이르면
萬國通明不起塵 만국이 통명하여 티끌도 일지 않으리

*자료 제공: 김천문화원 송기동 사무국장


저작권자 새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