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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종합

삶의 향기- 죄인처럼 보낸 시간들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0.07.12 08:58 수정 2020.07.12 08:58

함종순(시인·개령면 동부길)

작년 여름휴가 때 작은아들 광수가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준다기에 혁신도시에서 부담 없이 만나 밥 먹고 커피숍에 가서 차 한 잔하고 헤어졌다.
아직 친구사이라니까 적어도 1년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할지 말지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지난 1월 상견례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어서 두 말도 않고 우리 부부가 울산으로 가겠다고 했다.
단출하게 양가부모 만나 날도 6월 둘째 주 토요일로 잡았다. 길게 잡을 것도 없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해서 일사천리로 일이 잘 되어가는 것 같았다.

코로나19 이야기가 있어도 남의 나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구 한 종교단체와 청도병원에서 확진자가 나오면서 약간 심각하게 느껴졌다.
음력 2월 2일은 형님생일, 2월 8일은 남편생일이다. 해마다 생일 때만은 가족이 모여 밥을 먹었다. 남편생일 때는 새 며느리감도 오라고 해서 친척들에게 인사도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전국으로 확산 되면서 특히 대구 청도에서 확진환자가 많이 나오면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아주버님이 남편에게 전화가 와서 “이번 생일 때는 각자 집에서 해 먹고 만나지 말자”는 것이었다. 조금 서운했지만 시국이 시국인인만큼 애들도 못 오게 하고 남편 생일날 새벽에 밭에 가서 일을 했다.
그런데 청도에 사는 조카딸은 용감하게 엄마 생일에 왔다. “딸이 있어야 돼 우리 아들놈들은 죽을까봐 지 애비 생일에 한 놈도 안 오는데” 남편이 딸이 있는 형수를 부러워하자 조카딸 말이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아주버님이 마스크를 쓰며 “당장 돌아가 뭐하러왔어” 했다며 아빠는 딸이 왔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고 서운하다고 작은아빠한테 고자질을 했다.

처음에는 코로나19 겁이 나서 같은 김천에 살면서도 만나지도 못하고 전화 통화만 했다. 대구에 사는 큰 아들네는 5살 손녀를 며느리 외할머니가 와서 봐주는데 대구는 코로나가 무서워서 손녀를 데리고 청정지역 며느리 친정 창원으로 피신을 갔다.

주말에 며느리가 손녀 보러 창원에 갔더니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할머니가 “은율이(손녀) 얼굴만 보고 가” 했다고 한다.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고 싶어도 대구에서 왔다면 이웃사람들 눈이 무섭고 눈치가 보였다. 대구에 손녀 보러 못가고 화상통화를 하며 “코로나19 때문에 서로 오도 가도 못하고 고생이다” 하자 듣고 있던 손녀가 옆에서 “나 마스크 쓰고 김천 할머니 집에 가면 되는데” 한다. 다섯 살 손녀는 어린이집 가는 날보다 안 가는 날이 더 많았다.

결혼식을 앞둔 작은아들이 걱정이 되어 전화해서 코로나 조심하라고 했더니 “우리 걱정은 하지마세요. 우리 집에서 엄마가 제일 걱정이에요” 아들 눈에는 내가 면역이 약한 할머니로 보인단다.
아무리 독한바이러스도 여름에는 없어질 줄 알았더니 6월이 되어도 사라질 조짐을 보이지 않고 결혼식 날은 다가오고 우리 부부는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죽을 각오하고 결혼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마침 아들결혼식 때 경상도는 코로나19가 잠잠해져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신랑신부가 서울에서 오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하늘이 도왔는지 마스크 쓰고 많은 하객들이 도와줘서 무사히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식 날을 잡아놓고 죄인처럼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이 되었는데 친척들과 친구들이 많은 용기를 주었다. 아들 집 얻을 돈이 없어 막막했는데 긴급재난지원금도 받고 소상공인 대출을 받아 아들 집 얻는데 보태주어서 숨통이 터였다. 남편이 “자영업해서 이번에 처음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제 열심히 잘 살날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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