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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리즈

김천의 문화유산(7)

권숙월 기자 입력 2020.03.04 11:37 수정 2020.03.04 11:37

우리 고장 문화유산 바로알기
국가지정문화재, 도지정문화재 통해 지역 정체성 확립

경상북도 기념물 제91호 추량리 은행나무

대덕면 추량리 마을 입구에 소재한 이 은행나무는 1993년 8월 18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됐다. 서산정씨 11세손 정처우(鄭處祐)가 동몽교관을 지내고 낙향해 말년에 이곳에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은 것이 400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거목으로 자랐다.
나무 아래에 집이 들어서고 길이 났지만 지금까지 은행나무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는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예언이라도 하듯 3개의 큰 가지가 한꺼번에 땅에 떨어졌었다고 한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60호 섬계서원

대덕면 조룡리 섬실마을에 자리한 섬계서원은 2007년 12월 3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됐다. 1456년(세조 1)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귀를 꾀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체포돼 순절한 공조판서 충의공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와 아들 영월군수 김현석(金玄錫)을 배향하기 위해 1802년(순조 2) 김녕김씨 문중에서 건립했다. 1864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14년 경의제(강당)를 복원했다. 김문기는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원사육신으로 등재되고 1978년 사육신 묘역에 가묘를 봉안됐으며 사육신 공원 의절사(義節祀)에 위패가 안치됐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67호 유성리 소나무

증산면 유성리 옥동마을 증산면사무소 내에 위치한 수령 250년 된 두 그루와 200년 된 한 그루의 소나무로 2010년 4월 19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67호로 지정됐다. 당초 처진 소나무로 신청이 됐으나 세 그루 중 한 그루는 처진 소나무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두 그루는 보통의 소나무로 수령이 오래됐을 뿐만 아니라 수형이 수려하고 껍질이 거북등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재 소나무가 있는 증산면사무소 주변은 신라 말의 고승인 도선국사가 창건한 쌍계사(雙溪寺)가 있던 자리로 한국전쟁 중인 1951년 7월 14일 북한군의 방화로 소실되고 현재는 주춧돌과 소나무 세 그루만이 남아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68호 한강 무흘강도지

증산면 평촌리 장뜰마을 수도계곡 천변에 위치한 한강 무흘강도지는 2011년 12월 22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됐다. 무흘구곡(武屹九曲) 중 제7곡 만월담과 제8곡 와룡암 사이에 있는 무흘정사(武屹精舍)의 옛 터이다. 조선 중기 영남예학을 정립한 한강 정구(鄭逑)가 1604년(선조 37)에 처음 터를 잡았고 인근 청암사에 기거하면서 직접 공사를 지휘했다고 한다. 한강 선생은 이곳에 머물면서 저술활동을 했고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荑九曲)을 본따 무흘구곡을 경영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무흘강도지는 한강이 직접 거주하며 강학한 핵심 공간이었으며 이는 ‘한강언행록(寒岡言行錄)’, ‘뇌헌집(磊軒集)’ 등 여러 관련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조선 후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왕래하며 학문의 터전이 됐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 봉황대

교동 연화지 내에 위치한 봉황대는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됐다. 봉황대는 연화지, 김산향교와 함께 교동이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의 읍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유적으로 사방 3간의 2층 다락으로 1700년 창건돼 처음에는 읍취헌(邑翠軒)이라 불렀다.
원래 김산군 관아의 북쪽 구화산 아래에 있었는데 1838년 군수 이능연(李能淵)이 지금의 자리인 연화지 중앙으로 옮겼다.
연화지는 1707년부터 1711년까지 김산군수를 지낸 윤택(尹澤)이 솔개가 봉황으로 변해 날아오르는 꿈을 꾼 후 연못을 솔개 연(鳶)자에 바뀔 화(嘩)자를 써서 연화지(鳶嘩池)라 이름 지었고 날아간 봉황의 방향이 읍취헌 쪽인지라 다락이름도 읍취헌에서 봉황대(鳳凰臺)로 고쳤다.
따라서 연화지는 솔개이고 봉황대는 날아오르는 봉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솔개가 봉황이 돼 날아오르는 군수 윤택의 꿈이 실현된 공간인 것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8호 지례향교 대성전

지례면 교리에 자리한 지례향교는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8호로 지정됐다. 1426년(세종 8)에 지례현감 정옹(鄭雍)이 창건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90년(숙종 16) 현감 유후광(柳後光)이 중건했다. 지례향교는 소설(小說)로서 원래 5성(五聖)과 송조 4현, 동방 18현을 모셔 오다가 1949년부터 5성(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송조 2현(정호, 주희) 동방 18현(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을 제향한다. 석전대제는 공자 탄신일로 지내 오다가 지금은 음력 8월 상정일에 지낸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9호 개령향교 대성전

개령면 동부리 감문산 자락에 소재한 개령향교는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9호로 지정됐다. 개령현감 정난원(鄭蘭元)이 1473년(성종 4)에 동부리 마을 동쪽 유동산 감천변에 창건했는데 1522년 현감 태두남(太斗南), 1563년 현감 윤희주(尹希周)가 중수했다. 이후 잦은 침수로 1610년(광해 2년)에 현감 이창거(李昌居)가 관학산 아래에 옮겼다가 1837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했다. 일제강점기 말에 김산향교에 폐합됐다가 1946년에 복원되고 1988년부터 4년간에 걸쳐 중수했다.
개령향교는 지례향교와 같은 소설(小說)로서 5성, 송조 2현과 우리나라 18현을 제향한다. 석전(釋奠)은 공자 탄신일로 지내 오다가 최근에는 음력 2월 상정일에 지낸다.
개령향교는 영남만인소 사건 때 영남의 중심 서원으로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1881년 김홍집(金弘集)이 일본 주재 청국공사가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고종에게 바치고 개혁을 주창하자 안동 유생의 주동으로 이를 탄핵하는 만인소를 올려 사회가 큰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는데 영남지방은 개령향교를 중심으로 이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 청암사 대웅전

청암사 대웅전은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되었다. 859년(신라 헌안왕 3) 창건되고 1647년(인조 25)에 2차 중창, 1782년(정조 6)에 3차 중창을 거쳤다. 1911년 9월 21일 화재로 전소되어 대운화상이 3년에 걸쳐 중창했다. 규모는 정면 3간, 측면 2간, 총 23평의 팔작지붕이다.
대웅전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 후불탱, 산신탱, 신중탱, 칠성탱, 독성탱이 있다. 1987년 승가대학을 설립하여 비구니 스님을 양성하는 수학장이 되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청암사 다층석탑

청암사 대웅전 앞에 위치한 석탑으로 1985년 8월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됐다. 1912년 성주에서 옮겨 왔다고 전해지며 조선시대 후기 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으로 돼 있고 1층 옥신 4면에 좌불이 1구씩 양각돼 있다. 각층 옥신에 비해 옥개석이 넓으며 옥신 받침이 없으며 상륜부는 일부만 남아 있다. 원래 5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적으로 불안정하기는 하나 경쾌한 느낌을 주는 탑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 서부리 삼층석탑

개령면 서부리 마을 뒤 옛 사자사(獅子寺) 터에 자리한 삼층석탑으로 1985년 8월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됐다. 폐사된 후 무너져 오랫동안 6개의 탑편이 흩어져 있었던 것을 1997년 복원했다. 주변에 기와 조각을 비롯한 고려시대의 와편과 조선시대 자기편이 흩어져 있어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자사가 존속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 상륜부와 3층부터 위로는 없어지고 중층의 부재만 남아 있다. 초층 옥개석은 위에 2단의 괴임이 있고 낙수면의 반전은 심하지 않으며 옥개석 두께는 얇고 받침은 5단으로 돼 있어 전형적인 3층 석탑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1호 신안동 석불입상

조마면 신안리 밧새래마을 뒤 영탑골에 있는 불상으로 1980년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주민이 밭을 일구다가 발견했다. 1987년 12월 29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1호로 지정됐다. 돌 하나에 불상과 광배가 함께 조성됐고 두상은 별석으로 새겨 조립하도록 했으나 없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불상을 반출하려다가 주민들의 반대로 실패하자 두상만 떼어 갔다는 설이 있다.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워서 보병(寶甁)을 잡았다. 광배는 연꽃문을 새긴 두광과 불꽃문을 새긴 신광으로 구분되고 뒷면은 주형(舟形)의 평편한 광배로 조각했다. 겉옷의 조각 표현과 독립불상인 점으로 보아 여래상으로 추정되며 1996년에 보호각을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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