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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리즈

김천의 문화유산(6)

권숙월 기자 입력 2020.02.24 10:52 수정 2020.02.24 10:55

우리 고장 문화유산 바로알기
국가지정문화재, 도지정문화재 통해 지역 정체성 확립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7호 은기리 마애반가보살상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됐다.
어모면 은기리 인수골마을 뒤 수직의 넓은 바위면에 높이 2.9m의 불상을 양각한 마애보살상이다. 이 보살상은 삼산관 형상의 보관을 착용하고 반가부좌(半跏趺坐)의 모습으로 자연 암벽에 얕게 조각돼 있다.
전체적으로 좌상이기는 하나 상체가 길게 표현돼 있으며 하체는 생략해 처리했다. 신체의 상부 외향은 원통형이며 팔은 지나치게 가늘면서 길게 표현했다. 하체는 발의 형태만 파악될 뿐 다리 전체에 대한 사실적인 표현은 찾아보기 어렵다.
고려 전기의 마애보살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산관(三山冠) 형태의 보관을 착용하고 있다. 두상은 거의 직사각형에 가깝게 조각했고 광대뼈의 묘사도 엿볼 수 있다. 세모진 코와 다문 입 등에서 종교적인 근엄함보다도 세속적인 인자함이 엿보인다.
불신은 전체적으로 상체가 긴 느낌이며 어깨는 약간 움츠린 듯이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다. 착의 방식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서 옷주름의 처리 방식이 왼쪽 어깨로부터 왼쪽 팔목에 이르기까지 돋을새김 기법으로 형식화돼 있다.
양손은 아래로 드리워 있으며 오른손은 여원인(與願印)의 수인을 하고 왼손은 반가한 왼 무릎을 살짝 덮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보관 위쪽에 양옆으로 위에서 흘러내리는 낙수로(落水路)로서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홈이 파여 있다. 마애불로부터 1.5㎞ 떨어진 계곡 상류에 난함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어 이 마애불 일대에 암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0호 덕천리 석조관음보살입상


1990년 8월7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됐다.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봉산면 태화리 황울산 자락 미륵당에 있던 것을 1927년 백연수 보살이 용화사로 옮겼다.
머리에 정자관(程子冠) 형태의 보관을 썼고 양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의(通肩衣)를 걸쳤으며 다리 양쪽에는 손에 약호를 든 동자상을 새겼다. 광배(光背)는 배 모양의 주형(舟形)이고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쌍선으로 양각했다.
온화한 얼굴표현과 간결한 선의 처리는 고려시대 초기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불상의 형태는 우리나라 토속적 석불로 볼 수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직지사 석조나한좌상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나한좌상으로 원래 서운선사의 원불(願佛)로 전해진다.
호랑이를 어르는 모습에서 당당한 기품과 사실적인 표현기법이 돋보이며 화강암으로 조성됐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 문화의 절정기인 인종(재위 1123~1146), 의종(재위 1147~1170)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 9월29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됐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2호 정부인 문화류씨묘지명지석


묘지의 주인공인 정부인 문화류씨는 울진현령 조계문(曺繼門)의 부인이자 조선 성종 때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를 최초로 언해한 ‘두시언해(杜詩諺解)’와 유배가사의 효시인 ‘만분가(萬憤歌)’를 집필한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어머니이다. 1495년(연산군 1)에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아들 조위가 대제학 홍귀달(洪貴達)에게 묘지명을 받아 직접 글씨를 새긴 후 묘소 앞에 묻었다고 전해지며 2001년 묘소 보수작업 중 상석 밑에서 발견됐다.
조선시대의 묘지석이 상당수 전해오고 있으나 이 묘지석처럼 돌로 만든 것은 흔치 않다.
2006년 10월16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2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위탁 보관 중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4호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2008년 4월 2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4호로 지정됐다.
이 불상은 중앙의 본존불좌상과 좌우 협시보살좌상으로 이뤄진 석조삼존불좌상으로 석불에 도금이 된 상태이다. 삼존상의 손모양은 공통적으로 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손바닥을 위로 향한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본존불은 불신(佛身)에 비해 좁은 어깨에 머리가 크고 목이 짧아 움츠린 듯한 자세이며 신체의 굴곡이 나타나지 않은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다.
‘봉곡사중수사적’과 본존불의 복장에서 나온 ‘불상조성도금사적기’에 의하면 조성연대가 1670년으로 기록돼 있다. 17세기 후반의 불상은 주로 목조상이 많이 조성됐기 때문에 이 석조상의 사례는 특이한 경우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405호 봉곡사 명부전목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이 불상은 2008년 4월2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5호로 지정됐다.
중앙의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10구의 시왕과 녹사 2구, 판관 2구, 인왕 2구 등 도합 19구이다.
지장보살좌상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이며 승려모습인 도명존자는 합장했으며 무독귀왕은 관을 쓰고 홀을 들었다. ‘봉곡사중수사적’에 의하면 1690년에 제작된 것으로 기록돼 있고 명부전을 중건하면서 새롭게 제작해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후반에 성행한 조선 후기의 지장계(地藏系) 불상으로 현존하는 지장삼존상 가운데 연대가 오래된 작품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5호 청암사 아미타불회도


청암사 아마타불회도는 2009년 8월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415호로 지정됐다.
금니를 풍부하게 사용해 제작한 금선묘(金線描) 불화로 1790년 제한(濟閑) 등 7명의 화승이 참여해 직지사 내원암에서 조성했다.
중앙에는 결가부좌한 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정면으로 배열돼 있다. 또한 아미타불의 두광 좌우에는 합장을 한 가섭과 아난존자가, 상단 좌우로 시방불이 그려져 있다.
불화는 삼베 바탕에 검은 안료로 바탕칠을 한 후 각 존상의 신체에 금채(金彩)하고 옷 주름과 문양, 장식 등에 금니로 마무리했다. 옷 문양에 원문, 사각문, 당초문, 초문 등 다양한 문양을 사용해 매우 섬세하며 화려하다. 아미타불회도는 간략한 인물 구성, 힘 있는 필력, 정교한 문양이 묘사된 화려한 금선묘 묵탱으로 현존하는 조선 후기 묵탱 가운데 조성시기가 가장 빠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6호 청암사 신중도


청암사 신중도는 2009년 8월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6호로 지정됐다. 1781년(정조 5년)에 조성된 불화로 현재 김천 직지성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781년 청암사의 중창을 도모했던 환우당 시눌(時訥)이 불화조성을 주도했다. 현존하는 청암사 불화 중 가장 연대가 오래된 불화로 상하 2단으로 존상을 구분해 화면을 구성했는데 상단에는 제석천과 그 권속을,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팔부중을 그렸다.
이 신중도는 기존 제석도와 천룡도를 나눠 그리던 방식에서 벗어나 한 화면에 제석천과 위태천을 함께 그렸으며 제석천의 도상이 변하고 위태천의 위상이 강조되는 등 18세기 후반에 진행됐던 신중도의 새로운 형식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화이다. 전체적으로 화면구성이나 색감이 차분하고 안정감이 있으며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3호 김산향교


김천시 교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3년 4월 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3호로 지정된 김산향교는 임진왜란 때 소실돼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다만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산군 편에 “군의 남쪽 1리에 향교가 있다”라는 기록을 통해 볼 때 1530년 이전에 창건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1592년) 때 소실된 것을 1634년(인조 12년)에 조마 강곡 출신 진사 강설(姜渫) 강여구 부자가 2대에 걸쳐 중건했다. 이후 건물이 오래돼 퇴락한 것을 1871년 김산군수 이준영이 중건했다. 김산향교 터는 원래 고산사(孤山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관아에서 향교를 짓기 위해 절을 구화사로 옮겼다. 진산으로 불리는 산자락에 건립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외삼문과 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동무·대성전으로 구성돼 있다.
김산향교는 중설(中設)로서 공자를 주향(主享)으로 하고 4성과 송조 2현, 우리나라 18현을 종향으로 해 매년 음력 8월 27일에 석전대제를 지낸다. 향교는 책임자인 전교(典校) 아래 협의 기구인 장의가 있다. 옛날 향교의 교육은 50명 정도의 청소년 학생(15~16세 정도)을 동서 양재에 기숙시키고 300일 이상 숙식해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이에 합격하면 생원(生員), 진사(進士)의 호칭을 받으며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게 돼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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