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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리즈

김천의 문화유산(5)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0.02.24 10:34 수정 2020.02.24 10:34

우리 고장 문화유산 바로알기
국가지정문화재, 도지정문화재 통해 지역 정체성 확립

천연기념물 제300호대덕면 조룡리 은행나무


섬계서원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로 1982년 11월3일 천연기념물 제300호로 지정된 수령 700년을 자랑하는 김천지역의 유일한 천연기념물이다.
임진왜란(1592년) 때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에 불이 붙어 조금씩 타올라가는 것을 지나가던 노인이 호미로 긁어 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통해볼 때 당시에도 이미 노거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천지역 최고수령과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거목으로 높이가 28m에 달하며 나무 밑둥의 둘레가 11.6m로 성인 8명이 손을 맞잡아야 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전에는 이 은행나무에서 수확한 은행을 팔아 서원운영경비에 조달했을 만큼 많은 은행을 땄다고 하며 나무의 소유권을 두고 서원과 인근 토지 소유자간의 분쟁이 발생해 최종 섬계서원 소유로 판결이 났다고 한다.

등록문화재 제405호 부항지서 망루

부항면 사등리 부항지서 뒤편에 자리한 이 망루는 2008년 10월 1일 등록문화재 제405호로 지정됐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남로당계열 장교들이 주동한 여순반란사건이 진압된 후 국군에 쫓긴 좌익인사들이 지리산, 덕유산, 삼도봉 등 백두대간 일대로 잠입해 6·25전쟁 직전까지 빨치산으로 활동하며 군경과 대치를 이어갔다.
부항면은 산악이 험준한 백두대간 삼도봉에 인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로 연결되는 요충지인 관계로 이들의 주요 근거지가 됐다. 1948년 12월 이후 부항면 일대에 공비들이 수시로 출몰해 관공서를 습격하고 마을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부항면민들은 부항지서를 빨치산에 대항하는 지휘소로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의하고 지역 유지와 주민들로부터 찬조금을 받아 자재를 구입하고 부역을 자청했다. 부항지서 경찰관과 주민들은 지례면의 토건업자 박만성과 함께 1949년 4월 초부터 5월 말까지 2개월에 걸쳐 콘크리트 망루와 지서에서 망루를 연결하는 터널을 구축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도주로가 차단된 북한군들이 기존 백두대간에서 활동하던 빨치산과 합류해 규모가 천여 명에 이르러 ‘불꽃사단’이라 칭하며 부족한 식량과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수시로 부항면 일대 마을을 습격하고 부항지서를 공격했다.
당시 부항지서에 배치된 경찰 10여명으로는 대규모의 북한군과는 대적이 어려운 지경이었고 전시 중이라 지원 병력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부항면의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지역청년들이 의용경찰과 대한청년단 부항단원이라는 이름으로 자원, 참전했다. 적의 침입에 대비해 의용경찰과 청년단원들은 각 마을별로 할당량을 배정해 나무를 조달하고 망루를 보호하기 위한 진지를 구축하며 전의를 다졌다.

1951년 10월 4일 오후 2시부터 5일 아침까지 적 병력 1천여명이 막강한 화력으로 부항지서를 공격했다. 소총에 의지한 경찰관과 의용경찰, 청년단원들은 망루로 투척된 적의 수류탄을 다시 던져내는 악전고투를 펼친 끝에 부항 망루를 지켜내는 우리 전쟁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또 10월 23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2차 공격이 이어졌는데 적들은 외부 지원 병력 차단을 위해 전화선을 절단하고 무풍지서를 습격해 노획한 박격포를 쏘아대며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었으나 경찰관과 의용경찰, 청년단원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적의 끈질긴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양 전투에서 적의 공격은 막아냈으나 안타깝게도 순경 김영수와 의용경찰 이천만, 이강필, 이말기 등 4인이 전사하고 최유철, 김종렬 등 다수가 총상을 입었다.
2019년 6월 부항지서전투 참전기념비가 세워졌다.

등록문화재 제496호최송설당 동상


최송설당(崔松雪堂 1855~1939)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李垠)의 보모상궁으로 궁중생활을 하다가 1931년 전 재산을 희사해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설립했다.
현재 김천중고등학교(송설역사관)에 소장된 최송설당 동상은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목조각을 전공하고 홍익대학교 미술학부를 설립해 조각교육에 전념한 윤효중(1917~1967)이 1950년에 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동상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며 용접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에 리벳(rivet)으로 청동판을 연결시켜 조각상을 만들던 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012년 6월 등록문화재 제496호로 지정됐다.

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8호 김천 징장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됐다.
황금동 약물내기(약수동)는 일제강점기 말까지만 해도 전국에서도 유명한 방짜유기 공방촌이었다. 놋쇠그릇을 비롯한 놋쇠세숫대야, 놋쇠양푼, 놋쇠요강, 징, 꽹과리, 수저에 이르기까지 ‘방짜’는 김천의 명물이었다.
6·25 이후 놋쇠그릇은 스테인레스 그릇에 밀려나 지금은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됐지만 징과 꽹과리는 스테인레스나 플라스틱으로 대체 될 수 없었기에 지금도 옛날 그대로 만들어지고 있다.
징은 구리와 납을 1:4 무게 비율로 녹여 만드는데 녹은 쇳물로 손바닥만한 ‘바다기’를 쇠판에 올려놓고 앞매꾼, 전매꾼, 센매꾼이 번갈아 메로 두들겨 도둠질이라 한다. 직경 30cm정도의 넓적한 ‘초바다기’를 만든다. 바다기 3장을 포개어 한데 쥐고 달구며 두들겨 가장자리를 오그려서 징의 형태인 ‘이가리’를 만든다. 이가리를 대정이 불에 달구어 집게로 잡아 돌리면서 망치질해 바닥을 얇게 고르는 ‘싸개질’을 한다. 바닥은 가운데가 두껍고 중간이 얇고 가장자리는 보통으로 한다. 싸개질이 끝나면 불에 달구었다가 물에 담궈 강도를 조절하는데 이 ‘담금질’은 어두운 밤이라야 그 정도를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기본형태가 끝나면 곰망치로 두들겨 ‘울음잡기’를 하는데 첫 시험인 ‘풋울음’이 끝나면 태문양을 돌려 새기고 손잡이 끈 구멍을 뚫어 끈을 맨다. 끈을 매면 소리가 또 달라지는데 다시 두들겨 ‘재울음’을 잡으면 작업이 끝난다.
김천징은 황소울음처럼 구성지고 끝을 길게 끌다가 끝이 올라가는 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 과하주


과하주(過夏酒)는 예로부터 김천지방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토속주로 1987년 5월 13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됐다. 1718년 여이명(呂以鳴)이 저술한 향지 ‘金陵勝覽(금릉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옛날 금(金)이 나는 샘(泉)이 있어 김천(金泉)이라 불렀다. 그 샘물로 술을 빚으면 맛이 그렇게 좋고 향기가 높아 그 샘을 주천(酒泉)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이 금을 캐는 부역이 두려워 그 샘을 묻어버려 지금은 그곳을 알지 못한다. 김천과하주는 여산(礪山), 호산(湖山), 춘천(春擅)의 술과 더불어 국내에서 이름 있는 술이다. 타지 사람이 김천사람에게 술 빚는 방법을 배워서 빚어도 이곳 술과 같지 않다. 이는 샘물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과하주는 일제강점기에 김천주조회사에서 빚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됐다가 광복 후 재개되고 다시 6·25 한국전쟁으로 자취를 감췄다가 1984년 송재성씨가 시험양조 끝에 본격적으로 생산에 착수해 과하주의 맥을 이었다. 과하주의 재래 양조법은 찹쌀과 누룩가루를 같은 양으로 섞어 떡을 만들고 물을 넣지 않고 독에 밀봉해 저온으로 1~3개월 발효시켜서 만든다. 이렇게 해서 빚은 과하주는 알코올 14도 정도로 독특한 향기가 있고 맛이 좋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 가례증해판목


1974년 12월1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됐다.
연안이씨 경호 이의조(李宜朝)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거기에 자기의 학설을 첨가한 관례, 혼례, 상례, 제례를 집대성한 예서를 1771년에 지었다. 이 원고를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서각장인 김풍해(金豊海)가 직지사에서 황악산의 느티나무를 사용해 1792년 판목 475매를 완성했다. 관혼상제(冠婚喪祭)로는 전국 유일의 것이며 목각 기법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성초등학교 뒤 골짜기에 있는 명성재(明誠齋)에 보관돼 오다가 1996년에 방초정 뒤편에 숭례각이라는 이름의 수장고를 지어 옮겼다.
이곳에는 가례증해판목 외에 소학(小學) 판목 200여 장도 함께 보관돼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이숭원초상화


1974년 12월 1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됐다.
이 초상화는 공신에게 하사한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 1471년(성종 2년)에 받았다. 사모를 쓰고 교의(交椅 의자)에 앉아 얼굴을 약간 좌측으로 돌린 좌안팔분면의 전신교의상(全身交椅坐像)으로 비단에 그린 초상화다.
주인공인 이숭원은 형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을 지내고 좌리공신 3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봉군되고 청백리에 올랐다.
초상화를 그린 사람은 조선 전기의 화가 이상좌(李上佐)로 노비였다가 그림솜씨가 뛰어나 도화서에 특채되고 공신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려 뒤에 원종공신이 된 인물이다.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위탁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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