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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리즈

김천의 문화유산(4)

권숙월 기자 입력 2020.02.24 10:22 수정 2020.02.24 10:22

우리 고장 문화유산 바로알기
국가지정문화재, 도지정문화재 통해 지역 정체성 확립

보물 제1854호 고방사 아미타여래설법도


고방사 아미타여래설법도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현존하는 조선시대 불화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채색이 박락된 부분을 1980년경에 새로 칠하면서 17세기 불화의 고아한 색조를 상실했고 존상의 원형도 부분적으로 변형됐다. 2015년 3월 4일 보물 제1854호로 지정됐다.
이 탱화는 숙종 14년(1688)에 민원(敏圓)·죽총(竹叢)·경찬(竟粲)·학림(學林) 등 화사들이 모여 공동으로 제작했다. 화면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과 사천왕, 10대 제자와 신장들을 나란히 열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위치하고 존상들은 여유 있게 거리를 두고 배치해 구도가 안정감이 있다.
채색은 홍색, 연두색, 보라색, 노란색, 갈색 등의 밝고 투명한 중간색을 사용했지만 새로 칠한 녹색과 보라색 등의 색이 너무 선명하고 두터워 개채(改彩) 이전의 색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또한 각 존상이 입고 있는 복식은 무늬를 살리지 않고 그대로 색을 칠해버려 섬세하고 아름다운 무늬들이 사라져 버렸다. 다행스럽게 제자와 신장이 있는 상단부분은 훼손이 적어 그나마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부분적인 개체로 본래의 고색(古色)은 많이 상실됐으나 짜임새 있는 구도와 엄정한 존상의 모습, 차분한 색조 등이 여전히 이 탱화의 격을 지키고 있다.

보물지정예고 방초정


방초정(芳草亭)은 연안이씨(정양공) 집성촌인 구성면 상원리 83번지 원터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로 1625년(인조3) 방초(芳草) 이정복(李廷馥)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자신의 호를 따 건립한 정자이다.
훼손된 것을 이정복의 손자 이해(李垓)가 1689년 중건하고 1727년에 다시 보수했으나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난(무신란) 때 방화로 일부 소실됐다. 1736년 홍수로 감천이 범람하면서 유실된 것을 1788년 후손 이의조(李宜朝)가 수해로부터 안전하도록 지금의 위치로 옮겨 중수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주심포계 이익공 팔작지붕 양식으로 1974년 12월 1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됐으며 2019년 12월 30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47호로 지정됐다.
2층 누각 가운데 1칸 크기의 온돌방을 두고서 사방으로 분합문을 달았는데 중앙의 온돌방 사면은 벽체가 없이 모두 창호를 바른 분합문으로 구성돼 있다. 여름에는 문을 들어 올려 걸쇠에 걸고 겨울에는 문을 내리고 방 아래에 설치한 아궁이에 난방을 해 계절에 관계없이 정자를 활용할 수 있도록 활용성을 강조한 한 점이 특징이다.
화강암으로 된 2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온돌방을 구성하고 있는 누 상부 중앙의 사모기둥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주를 세웠는데 누하주의 경우 원목의 껍질만 벗기고 거의 가공을 하지 않은 도랑주에 가깝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지붕의 추녀를 받치기 위해 방형 활주초석 위에 원형 활주를 세웠다.
우물마루의 가장자리 사면에 설치된 난간은 치마널과 난간상방, 하방, 청판, 계자다리, 하엽, 난간대로 이뤄진 전형적인 계자난간(鷄子欄干)이며 난간청판에 구름문양의 풍혈(風穴)을 냈다.
방초정의 건립과 관련해서 감춰진 젊은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 이정복(당시 17세)이 양천동 하로마을 화순최씨 부인(당시 16세)에게 장가를 들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더라도 시댁에 가서 죽겠다며 신행길을 나섰다가 시댁마을에 들이닥친 왜병을 만났고 능욕을 당할 지경에 이르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마을 앞 웅덩이에 투신했다. 이때 부인을 따라온 하녀 석이(石伊)도 부인을 구하려고 연못에 뛰어들었다가 함께 빠져죽었다.
이정목은 훗날 재혼을 하면서 부인이 투신한 웅덩이를 확장해 ‘최씨부인의 연못’이라는 뜻의 최씨담(崔氏潭)이라 이름 지었다.
연못 옆에 자신의 호(號)를 딴 방초정을 지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부부의 인연을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기원했다. 비록 몸은 떠나지만 절개를 지키기 위해 먼저 간 어린 부인에 대한 사랑의 증표로서 방초정과 최씨담을 함께 세운 것이다.
훗날 지역 유림에서 최씨부인의 열행을 조정에 알리니 1632년 인조임금은 어필정려문을 내렸고 부인의 정려각이 세워졌다.
1975년 최씨담 연못 준설 공사 도중에 ‘忠奴石伊之碑(충노속이지비)’라 새겨진 작은 비석이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상전이었던 화순최씨 부인을 구하기 위해 웅덩이에 뛰어들었던 여종 석이의 비석으로 전설처럼 떠돌던 비석의 존재가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석이의 비석은 동민들에 의해 380여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주인인 부인의 정려각 앞에 세워졌다.
주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한 노비의 충성심에 감복한 연안이씨문중에서 비석을 제작했으나 반상(班常)의 신분이 엄격했던 당시의 사정상 차마 노상에 세우지는 못하고 연못에 던져준 것이다.
최씨담의 중앙에는 섬을 두 개 배치했고 가장자리에 땅버들나무와 백일홍을 심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정원형태는 조선시대 사대부 집성촌의 정자와 연못 조경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 독창적인 건축양식은 김천지방의 대표적인 정자인 만취정, 모성정, 무송정, 쌍호정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방초정 현판은 김대문(김대만)이 썼고 정자 내부의 기둥에는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한 시가 붙어 있는데 특히 방초정에서 바라다보이는 각 방면의 절경을 노래한 ‘芳草亭十景(방초정십경)’이 유명하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 빗내농악

빗내농악은 삼한시대 때의 변한계 소국으로 개령지방을 중심으로 성립했던 감문국(甘文國)의 나라 제사와 군사들의 조련과 전투과정이 투영돼 전승된 군사 풍물이다. 1984년 12월29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됐으며 2019년 9월 2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로 승격 지정됐다.
빗내농악이 전승되고 있는 빗내마을은 넒은 개령들을 앞에 두고 뒤에는 감문산성과 군사를 동원할 때 소라를 불어 신호했다는 취적봉(吹笛峰)이란 산이 있다. 전국 농악놀이의 대부분이 ‘농사굿’인데 반해 빗내농악은 ‘진굿’으로 가락이 굿판과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모두 12가락(질굿, 문국, 마당굿, 영풍굿, 소리굿, 기러기굿, 허허굿, 쌍둥이굿, 판굿, 영산다드레기, 진굿, 상사굿)으로 구성됐고 이 12가락은 긴 것과 짧은 것의 119마치로 세분된다.
빗내농악은 1961년부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등 전국의 풍물경연대회에 출전해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김천 풍물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있다.
빗내농악을 보존하기 위해 2003년 부지 1천24㎡, 총건평 265㎡(지상 2층), 야외공연장 237㎡ 규모로 전수관을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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