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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향기- 마음이 뒤척인다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5.11.10 15:11 수정 2025.11.10 15:36

배영희(수필가·효동어린이집 원장)

한 바구니에 만 원짜리 사과를 샀다. 군데군데 흠이 있어 팔지 못한 과일 같았다.
엄마는 늘 그랬다. 싸고 양이 많은 것만 찾아다니셨지. 검버섯이 돋은 사과 껍질을 도려내며 엄마 생각에 잠긴다.
아흔한 번의 가을을 건너오느라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산전수전 마음고생은 둘째 치고 몸 어디 한 곳도 성한 데가 없다. 당뇨병으로 발톱까지 뽑아냈고 욕창으로 살을 도려냈으며 자궁암 수술에 중이염, 녹내장, 틀니, 무릎 수술까지 한 평생 병마와 싸우다가 세월 다 보내셨다. 걸을 수만 있어도 좋을 텐데 이제 소변 줄을 끼고 대변도 받아내는 신세가 되셨으니 살아있어도 산목숨이 아닌 것 같다. 요양원엔 절대로 안 간다 하셨지만 요양원에 가신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 굵던 팔뚝 살도 흐물흐물해지고 밥숟가락도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하니 구십 년 세월 앞에 그저 마음만 아리다.

요양원에 가져갈 가을옷을 챙기려 장롱을 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레이스 속옷과 실크 블라우스까지 상표도 떼지 않은 새 옷이 여러 벌 있었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늙지 않은 엄마도 천생 여자였다. 새 신발도 있었다. 분홍색 구두에 발목까지 오는 털신은 곱기도 하다. 다음에, 이 다음에 좋은 날 신어야지 하셨겠지. 아끼고 아끼다가 한 번 신어 보지도 못하고.

늙음과 죽음은 남에겐 당연한 일이건만 나에겐 특별한 일이 된다. ‘잡아함경’에 보면 “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며, 자기와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원인 없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다만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한다.
무릇 씨앗 한 톨도 싹을 틔워 푸른 나무가 되고 단풍 들어 낙엽이 진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나의 일이 되면 얼마나 새삼스러운지 모른다. 나무가 옹이를 달고 벼락을 맞으며 비바람을 견딘다는 걸 알지만 내 손톱 밑에 가시 하나는 죽을 만큼 아프다.

얼마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옆에서 보기가 참 안타까웠다. 구강암에 걸려 피를 토하기를 3년, 아무것도 삼키지 못한 채 결국 뼈만 남을 때까지 견디다가 가셨다. 통증이 너무 심하니 진통 완화제도 소용이 없었고 자는 잠에 죽는 게 소원인데 죽어지지가 않는다고 전화기에 대고 참 많이도 우셨다.
태어남은 기쁘고 죽음이 슬픈 것이 아니라 마지막 병마와 싸우다 죽어야 하는 삶의 뒷모습이 너무 가혹한 것 같다. 어찌 남의 이야기라 할 수 있을까. 앞으로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죽음의 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요양원에 들어서자 엄마는 “와 이리 늦게 오노?” 하며 못마땅해하신다.
“엄마, 토요일마다 오잖아요”해도 섭섭해하신다.
전동침대를 일으켜 세우고 머리를 받치고 양쪽 겨드랑이 밑에 베개를 받쳐 간신히 앉으셨다.
“내 말 좀 들어봐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누워있을 일이 아니다” 하신다.
“엄마, 어쩌시려고요?"
“내가 어서 일어나 구멍가게라고 해야지, 안 그렇나?”
엄마는 자기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함을 잊어버리고 젊은 날 생각만 훤하다.

지난주엔 이런 이야기도 하셨다.
"네가 요양원을 지어라, 내가 다 가르쳐 줄게” 설계는 이렇게 하고 내 방은 맨 안쪽에 넣으라 하신다.
노년은 하나씩 놓아주는 것인데, 어차피 늙어지고 죽어질 몸이라면 정신도 흐려졌으면 좋겠다. 살짝이라도 현실을 잊어버리면 차라리 마음의 고통은 덜하지 않을까.엄마는 자신을 낫게 하지 못하는 의사가 원망스럽고 눕혀 놓은 자식이 이해 안 되는 것 같으니 마음이 지옥이다. “다음 주에 올게요” 하고 돌아서는 칠십 줄 딸의 뒤꼭지에 대고 “오늘 밤에 나는 어째서라도 도망간다. 그리 알아라”며 대못을 박는다.

마음은 늘 제멋대로 뒤척인다. ‘엄마, 제 곁을 떠나지 말고 오래오래 사세요’했다가, ‘고통 덜 받으시고……’라고 하기도 한다. 엄마 뒷바라지가 어쩜 자식 키우기보다 힘들다는 생각도 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사과를 입에 넣으니 단지 쓴지 맛을 모르겠다. 다음에는 흠 없는 사과를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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