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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을사년 뱀의 해 특집- 뱀에 얽힌 김천의 흥미로운 풍수지리 이야기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5.01.17 15:46 수정 2025.01.17 15:52

국내외적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열두 가지 띠를 상징하는 십이지(十二支)의 여섯 번째 동물인 뱀의 해로서 을사년(乙巳年)이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민속적으로 뱀을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열정, 패기와 굳건한 힘을 가진 길상(吉祥)의 동물로 인식해 왔다.
모쪼록 새해에는 뱀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열정적이고 힘찬 한 해가 되어 정상적이고 상식이 바로서기를 바라며 김천지역의 뱀과 관련된 흥미로운 풍수지리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뱀의 머리인 사두혈 명당에 안치된 정종대왕 태실

△태봉 전경

풍수지리설은 중국 당나라 때 정립된 이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전역에 파급돼 고을과 마을, 주택, 묘지, 사찰 등 주요 건축물의 터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지표로 삼아왔다.
풍수지리의 도입 초창기는 불교가 국교였던 신라 말 무렵인지라 사찰과 왕실에서 이를 적극 도입해 적용했고 이것이 고려시대에 보다 체계화됐다. 효를 근본으로 건국한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조상을 명당에 안장하는 것이 효(孝)에 부합한다는 유교정신으로 확대되면서 더욱 크게 발전했다.
이와 같은 풍수지리설은 조선 왕실에서도 왕가의 권위를 높이는 일환으로 적극 활용했는데 왕이나 왕자, 공주의 탯줄을 명당에 안장함으로써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황악산 직지사 대웅전 뒷산인 태봉, 정종대왕의 태실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여기에 뱀과 관련된 흥미로운 풍수지리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2대 정종대왕의 태실은 해발 100미터 남짓한 야산으로 황악산에서 뻗어 내려오던 주맥(主脈)이 태봉 아래에서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솟아오른 외형상으로도 삼각형태의 전형적인 태봉이 갗춰야 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1등지 태봉이다. 이 산은 풍수지리상으로는 뱀이 머리를 들고 있는 뱀 사(蛇), 머리 두(頭)자를 사용한 사두혈(蛇頭穴)의 명당터로 알려지고 있다.
1399년 태실이 조성된 이후 태봉으로서 보호를 받은 까닭으로 지금까지 수백년은 족히 됨직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산 전체를 감싸고 있다. 정상부 태실 조성지에는 둘레석 1기와 파손된 석재들이 무수히 산재돼 있으며 중동석과 2기의 둘레석이 극락전 잔디밭과 성보박물관 앞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태봉 정상

정종(1357-1419)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이방과 李芳果)로 태어나 1398년 부왕인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어 조선 2대 임금으로 등극했으나 곧 아우인 태종 이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한 인물이다.
정종은 자신이 즉위한 다음 해인 1399년에 고향 함흥에 안치돼 있던 태실을 뱀의 머리에 해당한다는 사두혈의 명당인 직지사 대웅전 뒤 북봉에 안치하고 직지사를 태실 수호를 위한 수직(守直)사찰로 지정해 노비와 전답을 하사했다.
이후 왕실과 직지사의 보호를 받으며 존치돼 오던 태실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태실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는 미명 아래 파헤쳐져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안됐고 이후 태실지의 존재는 잊혀진 역사가 됐다.

뱀의 기운을 막기 위해 태봉이 잘리고 개구리봉이 생긴 사연

△개구리봉

하나의 산으로 보이는 태봉을 유심히 살펴보면 두 개의 산으로 나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사명대사공원의 일부가 된 개구리봉으로 불리는 야산이 태봉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산으로 산 입구에 ‘正二品 資憲大夫 宮內府 特進官 雲庭 張公之 墓’라고 새겨진 큰 비석이 예사롭지 않다. 비석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국무총리 장택상의 부친인 장승원(張承遠)의 묘소가 나타난다. 장승원은 1852년(철종3년) 장석구의 아들로 태어나 판서 장석용의 양자가 됐다. 1885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 청송군수와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다. 조선시대 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많은 농토를 소유한 대지주로 정부인 풍양조씨와의 사이에 길상, 직상, 택상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1917년 독립운동에 쓸 군자금을 내지 않았다고 박상진이 이끄는 대한광복단 단원에게 암살당한 인물이다.
장승원의 묘소가 들어선 개구리봉은 원래 직지사 대웅전 뒤 태봉과 연결된 하나의 산이었는데 지금과 같이 두 개의 산으로 나뉘게 된 풍수지리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종대왕의 탯줄이 묻힌 태봉은 예부터 뱀이 머리를 쳐들고 있는 사두혈의 명당으로 유명하다는 소문을 들은 장승원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로부터 태봉 일대의 임야를 매입했고 일찍이 사후에 태봉에 묻히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부친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유족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풍수지리에 정통한 지관(地官)을 김천으로 보내 묘터를 잡게 했다. 지관은 현재의 묏자리를 잡아주며 뱀의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산을 잘라야 한다고 해서 장례를 미루고 많은 인원을 동원해 산을 파내어 지금과 같은 형상으로 두 개의 산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장승원 묘소

그런데 산을 자르고 보니 태봉 맞은편 산이 개구리를 닮은 형상으로 변해버렸고 뱀의 형상인 태봉이 개구리를 노려보는 형국이라 우환이 있을 것을 염려해 뱀이 개구리에게 위해를 가할 때 피난처로서 개구리봉 옆에 저수지까지 축조하기에 이르렀는데 지금의 사명대사공원 내 5층 목탑 앞 저수지가 이때 판 저수지인 것이다.
개구리봉과 북암저수지의 면적이 유사하고 언제라도 개구리가 도망칠 수 있도록 항상 물이 가득 차 있어야 하므로 원래는 수문(水門)도 만들지 않고 관리인까지 상주시켰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완벽한 비보책(裨補策)을 강구한 연유에야 묘역을 완성했다고 한다.
훗날 셋째아들인 장택상이 수도경찰청장과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이 사두혈의 기운을 끊은 명당에 선친의 묘소를 들인 덕택이라는 이야기가 당시에 회자됐다. 실제로 장승원의 묘소가 있는 개구리봉은 풍수지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다녀간다는 뱀의 자리, 곧 사두혈 풍수지리의 교본이 된 지 오래다.

구성면 흥평리 고노실마을 미산골 사두혈 뱀 이야기

△고노실마을

고노실마을은 평밭, 진흥, 점터와 함께 구성면 흥평리로 속하는 4개의 마을 중 하나이다. 고노실에서 점터로 넘어가는 국사봉 자락 미산골은 예부터 덕대산에서 뱀처럼 길게 산이 이어져 사두혈의 명당터로 이름이 높았다. 고노실에는 옛날 서씨 성을 가진 큰 부자가 살았는데 어느날 한 스님이 시주를 받을 요량으로 이 부잣집을 찾았다는 것이다.
부자는 크게 화를 내며 스님을 박대하며 쫒아냈는데 이를 지켜보던 최씨성을 가진 머슴이 뒤따라가 쌀을 건네주며 머슴살이의 고충을 한탄했다고 한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스님은 시주에 대한 보답으로 머슴살이를 벗어날 비책을 일러주었는데 미산골 사두혈에 안장된 서씨 부자의 조부묘터를 가리키며 호미로 묘를 세 번 긁어보라고 했다.
머슴이 스님의 말대로 했더니 이후 삼일 밤낮을 비가 쏟아지더니 큰 산사태가 나서 미산골 사두혈의 서씨 조부 묘소가 유실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후부터 서씨부자의 가세가 기울었고 머슴은 소원대로 머슴살이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훗날 스님을 다시 만난 머슴이 자초지종을 물었는데 스님이 말하길 미산골 사두혈은 뱀이 입에 개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 그곳에 조상의 묘소를 들인 서씨 부자가 대대로 재산을 키운 것인데 호미로 뱀의 머리를 긁어 놀란 뱀이 개구리를 놓쳐 집안이 기울게 된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미산골을 둘러보면 덕대산으로부터 고노실마을 뒷산인 국사봉 방면으로 뱀이 길게 누운 형상으로 좁게 내려오다가 미산골에서 칼로 자른 듯이 끊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어 뱀에 얽힌 전설을 뒷받침해주는 듯하다.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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