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해보다도 길었던 장마도 끝이 나고 바야흐로 8월, 무더위와 함께 휴가의 계절이 찾아왔다. 바다로 계곡으로 저마다 가슴 한가득 부푼 꿈을 안고 피서라는 이름의 휴가를 떠나지만 도로정체와 바가지요금,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불쾌한 휴가의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금년에는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천의 최중심지로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숨겨져 있는 도심 속 비밀의 정원, 남산동으로 휴가여행을 떠나보자. <편집자 주>
20여개 속역 거느린 역참의 중심, 김천도찰방역
남산동 옛 이름 찰방골에 얽힌 역과 말, 마패
현재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평화남산동이 됐지만 통합되기 이전의 남산동은 원래 찰방골이라 불렸다. 찰방은 옛날 말과 수레가 교통의 중심이었던 전통 역참제도 하에서 말의 정거장인 역을 관장하던 책임자였다.
김천도찰방역장은 병조에서 파견한 김천일대 교통행정의 최고위직 관료로서구미, 칠곡, 대구, 고령, 성주, 거창, 함양, 함안 일대의 도로와 역, 봉수대 등을 관리했다.
김천도의 핵심인 김천역은 김천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남산동 일대로 종6품의 김천도 찰방1인과 김천역장1인, 임(林)씨와 한(韓)씨가 세습하는 역리와 역졸이 693인, 역노(驛奴 남자종) 316인, 역비(驛婢 여자종) 151인으로 구성됐다고 알려진다.
이런 연유로 역이 있었던 남산공원 일대는 찰방골로 불리며 현재까지 김천초등학교 교정과 남산공원에 찰방선정비가 5기 남아있다. 김천찰방을 역임한 인물 중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경종2년(1722년)에 노론관료들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지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에 연류돼 위기에 처했다. 그 빌미가 된 것이 이중환이 김천찰방으로 재임할 때 목호룡이 김천역에서 말을 타고 갔다는 것인데 이중환은 끝까지 목호룡이 말을 훔쳐간 것이라고 주장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유배지에서 풀려난 이중환은 당쟁이 없는 살기좋은 곳을 찾기 위해 전국을 유랑했고 그 결과 ‘택리지(擇里志)’라는 역작이 태어나게 됐다.
관련 사료를 근거로 볼 때 김천역의 규모는 지금의 김천시 남산동 일대를 중심으로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김천역을 근거로 생업을 영위하는 다양한 주민들이 역 인근에 자리를 잡으면서 독특한 형태의 역촌마을과 시장이 형성됐다. 김천역은 도로와 시장 발달의 동력으로 작용해 역촌(驛村)의 형성과 문물의 집산을 촉진시켜 김천장을 전국 최대 규모의 시장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김천도찰방 선정비(김천초등학교 내)
개운사에서 남산공원 사이 맥을 끊고 신사를 세운 일제
남산공원과 김천신사, 남산루, 비석에 얽힌 사연들
평화남산동의 주산인 고성산은 예부터 풍수지리설로 볼 때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온다”는 노서하전(老鼠下田)형의 길지로 일컬어지는데 쥐의 오른쪽 발에 해당한다고 전해지는 명당터가 남산이다. 이러한 이유로 지역주민들은 남산과 개운사를 연결하는 고갯길을 낮추지 않고 우회해 다니는 수고로움도 감수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6년 김천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개운사와 남산으로 연결되는 명당의 기를 끊기 위해 도로를 내고 남산에 신사를 조성한 후 벚나무를 심었다.
또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과 석등, 돌다리(남산교)를 설치하는 등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을 벌여 1928년 7월 18일 정식 신사로 승격했다. 이후 일본의 국경일이나 2차 대전 선전포고일 등 각종 기념일마다 김천지역 학생과 시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광복 후 김천신사의 모든 건물과 구조물은 철거되고 현재는 석등 5기 만이 남아있다. 김천신사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조상들이 나라 잃은 설움을 감내하며 내선일체를 강요받았던 아픔의 상징인 것이다.
△김천신사
△현재의 남산공원 계단
광복 후 신사는 해체되고 공원으로 조성되어 남산공원으로 이름하고 도서관이 건립됐으며 훗날 시립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공원 내에 자리한 남산루는 일제강점기 때 교동 김산관아에 있던 객사 건물인 금릉관(金陵館)을 이전한 것인데 한국전쟁 중에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남산동 출신인 재일교포 배현익이 어릴 때 이곳에서 놀았던 추억을 기념해 1억원을 들여 1980년 재건해 남산루라 이름했다.
△남산루
남산공원에는 김천 출신이거나 김천과 인연이 깊은 인물들의 시비와 비석이 세워져있다.
이해인 수녀는 1945년 강원도 양구군에서 태어나 1961년 성의여고에 입학하면서 김천과 인연을 맺게 됐다. 재학 중 제2회 신라문화제 전국고교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는 등 학창시절부터 뛰어난 문예실력을 자랑했다. 이해인 수녀에게 있어서 성의여고 3년간 김천에서 보낸 학창시절이 사람들의 영혼을 따뜻하게 울리는 대시인으로 성장하는데 문학적인 토양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작곡가 문호월은 1908년 진주에서 태어나 김천으로 이주 후 1918년 김천공립보통학교(현 김천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독학으로 음악공부를 했으며 우리릐 전통적인 민요조의 가요만을 작곡했다. 1934년 작곡한 ‘노들강변’은 ‘아리랑’, ‘도라지’, ‘양산도’, ‘천안삼거리’와 함께 우리나라 5대 민요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김기환은 호가 도양(島陽)으로 1930년 김천에서 태어난 수필가이자 시인으로 1962년 ‘현대문학’에 ‘돌풀’을 발표한 이래 기인적인 천재 수필가로 활동했다. 평소 호방한 성격에 애주가로 지역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1969년 술에 만취해 부곡동 원골 개천에 추락해서 사망했다.
배병창은 1927년 김천 출신의 시조시인으로 호는 수운(秀雲)이다. 김천중학교 한문교사로 재직하며 오동시문학구락부 회원으로 참여한 이래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활동했다.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기(旗)’가 당선돼 유명해졌는데 ‘기’는 우리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다.
정완영은 1919년 김천 봉산면에서 태어난 시조시인으로 2016년 96세로 작고했다.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해바라기’가 당선돼 등단한 이래 자연과 인간 내면의 정서를 교감한 작품을 발표하며 우리나라 현대시조발전에 기여했다. 1979년 한국시조문인협화장을 역임했으며 2018년 백수문학관이 건립되고 백수문화재단이 설립됐다.
△남산공원 내 선정비
남산공원 내에는 찰방, 현감, 군수, 부사, 관찰사 등 9기의 조선시대 김천과 관련된 관리들의 선정비가 있다. 순서대로 살펴보면 부사 정진행(鄭鎭行) 불망비, 현감 허육(許稑) 청덕애민비, 군수 이석(李襫) 청덕선정비, 군수 민동혁(閔東爀) 선정불망비, 순상국 김명진(金明鎭) 영세불망비, 군수 이해ㅇ(李海ㅇ) 선정비, 군수 이위재(李渭在) 애민선정비, 찰방 이휘초(李徽初) 영세불망비, 관찰사 홍ㅇ철(洪ㅇ喆) 청덕선정비이다. 다섯 번째 비의 순상국(巡相國)은 정승에 준하는 고위관리의 순시를 의미하는데 김명진은 1888년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편강열의 호는 애사(愛史)로 선조로부터 대대로 어모면 다남리 진목(참나무골)에서 살다가 할아버지가 황해도로 이주하면서 1892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1911년 평양 숭실학교 재학 시 총독피살 사건에 연루돼 2년간 투옥됐고 1914년 선대 고향인 김천으로 내려와 개령면 덕촌리에 서당을 열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항일교육을 했다. 1919년 항일 무력투쟁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돼 7년간 투옥됐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1928년 37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여중룡의 호는 남은(南隱)으로 1856년 구성면 금평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김산향교에서 의병을 조직했고 1904년 서울로 올라가 독립애국단체인 충의사를 결성했다. 1906년 일본공사관 폭파 계획을 세우다 체포돼 7개월간 투옥됐다. 1907년 김천에서 의병을 모아 항전을 거듭하다 병을 얻어 1913년 58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는 개운사와 학사대, 과하천, 노실고개
개운사는 남산공원 뒤편에 있다. 1918년 춘담화상(春潭和尙)에 의해 창건된 이래 팔공산 동화사의 포교당으로 운영됐다. 1926년 교구 개편으로 문경 김용사의 포교당으로 변경됐다가 문경이 직지사의 교구에 속하게 돼 김천시내 포교당으로 운영되면서 직지사의 말사가 됐다. 개운사는 제8교구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포교당으로서 김천시내의 신도확장에 기여했다.
명부전에는 2003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목조시왕상 등 19구가 봉안돼 있다. 이들 유물은 1685년 조성된 이래 증산면 쌍계사 명부전에 봉안돼 있었는데 1943년 일본인들이 고미술품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김천역으로 옮겨왔다가 해방이 되면서 쌍계사로 반납하지 않고 방치돼 있던 것을 개운사에서 명부전을 신축해 봉안하게 된 것이다.
△개운사
개운사에서 운영하는 녹야유치원 자리는 신라말의 학자로 유․불․선에 능통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67-?) 선생이 가야산 해인사 고운암에 은거하고 있을 때 김천에 들러 이곳 높다란 절벽에 올라앉아 학문을 강론했다고 전해진다. 학사대라는 지명은 최치원이 신라 헌강왕대에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하는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된 이후 선생이 머물다간 장소를 관직명을 따서 학사대라 이름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일대는 고성산의 북쪽 끝자락으로 김천의 옛 삼산(三山)인 황산(凰山), 자산(鷓山), 응산(鷹山)과 이수(二水)인 감천(甘川), 직지천(直指川)이 한눈에 조망되는 절경지로 예부터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 유명하다.
△고운 최치원
학사대를 지나면 나타나는 과하천은 김천(金泉)이라는 이 고장의 지명이 유래된 샘으로 원래는 금을 캐던 금광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금광으로 이용되던 중 물이 솟아나 금 채굴을 중단했는데 그 물맛이 지극히 달고 차가워 사람들이 샘으로 사용하면서 금을 캔 샘이니 금천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훗날 이 샘물로 술을 빚었는데 다른 술과 달리 여름을 지나도 그 맛이 변함이 없어 넘길과(過)에 여름하(夏)자를 써서 과하주라 했고 이때부터 과하천 또는 주천으로도 불리며 이 지방을 대표하는 술과 우물로 자리매김 했다. 이것은 고려시대 초 역참제도의 정비로 이 지방에 역이 처음 설치되면서 역명(驛名)을 정할 때 이 샘의 이름을 따서 김천역(金泉驛)이라 한 것만으로도 이 우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김천역에서도 과하천의 물을 물지게로 져서 길어다 썼다고 하며 아침 저녁으로 물지게 행렬이 장관을 이뤄 이 일대마을을 지게동이라 불리게 만들었다. 과하천은 1990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는데 주변에 주택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음용수로는 사용할 수가 없게 된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샘 앞에 ‘金陵酒泉 光緖8년’이라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1882년(고종19)에 세운 것으로 과하천의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난중일기’ 중 과하주 기록
△과하천
△과하주
△노실고개
노실고개는 황금동, 남산동에서 평화동을 연결하는 고성산자락의 고갯길로 풍수지리설로 볼 때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간다는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명당으로 알려졌다. 노실고개의 원래 이름은 늙은 쥐 고개라는 뜻의 노서고개였는데 음이 변해 노실고개가 됐다.
우리조상들은 십이지신(十二支神)의 첫 번째인 쥐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며 산전수전을 겪은 노련하고 부지런한 쥐가 풍족한 먹이가 있는 밭으로 간다는 의미로 해석해 이 터에 사는 사람들은 큰 복을 누릴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노실고개 인근에서 예부터 큰 부자가 많이 나왔는데 이러한 전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 같은 이야기는 예부터 고성산의 모양이 쥐를 닮았다는 풍수지리에서 비롯됐다. 즉, 고성산이 쥐의 몸통이며 머리와 입은 중앙초등학교와 교육청으로 이어진 능선이며 왼쪽 앞발은 시립도서관, 오른쪽 앞발은 개운사에서 남산공원으로 이어진 능선이라고 보았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남산에 신사(神社)를 세울 때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명당의 맥을 끊기 위해 개운사와 남산공원 사이의 고개를 파내어 도로를 냄으로써 쥐의 오른팔을 잘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송기동(김천문화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