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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6․25 특집- 동족상잔의 비극 ‘김천과 6‧25’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4.06.19 14:44 수정 2024.06.19 14:53

1950년 7월 29일 지례면 관덕리에서 인민군과 첫 전투
7월 31일 김천소개령 발동되며 인민군 치하 50일 시작
김천시민들, 선산과 청도 대구 등지로 피난살이 고충
낙동강 전선 인민군사령부 설치, 폭격으로 시가지 초토화
증산‧부항지서 전투 등 군경 시민들의 눈물겨운 결사 항전

▲폭격으로 소실된 김천시가지

치욕스러운 36년간의 일제강점기로부터 마침내 광복의 기쁨을 누린 것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대대적인 남침으로 또다시 한반도는 암흑의 시절을 맞았다. 6‧25발발 74주년을 맞아 두 번 다시 이러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당시 처절했던 김천시민들의 전쟁생활사를 소개하고자 한다.<편집자주>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든 김천과 피난살이
처음 김천시민들에게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라디오를 통해 전해진 것은 6월 25일 아침 7시경이었다. 당시 수시로 38선 인근에서 국부적인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사소한 충돌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전세는 가열되고 정부가 대전으로 임시수도를 이전했다는 소식이 전해짐과 동시 남쪽으로 줄을 잇는 피란 대열을 보고서야 급박한 상황이 닥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뒤이어 다시 정부가 대구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한층 긴박감에 휩싸였다. 김천지역 각 학교는 7월 1일부터 일제히 휴학에 들어갔고 김천의 모든 관공서와 시민들은 피난하라는 속칭 소개령이 내려진 것은 7월 31일 오후였다. 각 기관 단체들이 주민들에게 골고루 후퇴령을 알릴 겨를도 없이 먼저 후퇴했고 그날 밤 11시 김천역에서 마지막 열차가 부산으로 떠난 뒤 철도도 마비되고 말았다.
7월 초부터 서울 방면에서 김천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란민은 하루에도 10만 명에 이르렀으며 피란민 행렬 속에 인민군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군 당국이 7월 중순부터는 경부선 국도를 차단했기 때문에 피란민들은 개령을 경유하는 선산 방면 도로를 주로 이용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놀란 김천시민들은 소중한 물건들을 땅속에 묻거나 그냥 버려둔 채 당장 요긴한 것을 챙겨서 소달구지나 리어카, 지게에 싣고 선산, 대구 등 남쪽으로 무작정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행렬
8월 1일 오후 3시, 왜관 경부선 철도와 인도교가 폭파됐다. 이 바람에 강을 건너지 못한 피란민들은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너려다 떠내려가 죽은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국군은 인민군들이 피난민으로 가장해 낙동강을 넘어갈 것을 우려해 도강을 막아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되돌려 집으로 돌아오거나 선산, 청도, 대구, 성주 등 후미진 골짜기를 찾아 옮겨 다니면서 비참한 피란살이를 해야만 했다.

김천에서의 첫 전투와 공산 치하 50일
인민군 야전사령부 설치된 김천, 유엔군 폭격으로 초토화
김천 소개령이 내려진 이틀 전날인 7월 29일 영동을 침공한 인민군 선봉대가 지례면 관덕리 구수골에 나타났다. 당시 증산면 유성리 옥동마을로 후퇴해서 주둔하고 있던 경기도 이천경찰서 경찰관들과 증산지서 경찰관, 증산면청년단원 등 200여명의 병력이 출동해 인민군 15명과 교전 끝에 11명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했다. 1명은 도피하여 민가에 숨었다가 달아나면서 가족을 사살했고 결국 생포됐는데 이 전투가 김천지역에서의 첫 인민군과의 전투로 기록됐다. 이후 인민군 일부가 대덕산을 넘어 지례를 경유해 7월 31일 구성면 송죽리 궁장마을로 침입했는데 충북 경찰청 소속 경찰관들과 미군 일부가 합세해 이들과 교전을 벌여 아군 1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성주로 철수했다.
8월 3일, 김천이 인민군의 점령하에 들어가고 왜관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전선이 구축되자 김천에 인민군 임시 야전사령부가 설치됐다. 남면 부상리 옛 경부선 터널(부상터널)에 사령부와 부상병 치료를 위한 야전병원이 들어서고 낙동강 전선을 시찰하고 부상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김일성을 비롯한 인민군 수뇌부가 극비리에 김천을 방문한다는 첩보가 미군정보부대에 탐지돼 유엔군 항공기의 융단폭격이 시작됐다.

▲인민군 야전 사령부 겸 병원으로 이용된 부상터널

특히 8월 31일과 9월 2일 두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폭격으로 시가지는 일시에 초토화됐고 이 폭격으로 적군이 입은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때 김천은 관공서를 비롯한 각 기관, 공공건물과 중심지 주택 건물이 거의 폭파 소실됐는데 다행히 살아남은 건물로는 김천극장, 조흥은행, 성내동 옛 상공회의소 등 손꼽을 정도인 것으로 봐도 처참했던 당시의 김천시가지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인민군들은 정치공작대를 만들어 김천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동조하는 좌경분자를 포섭해 공산주의 사상을 심기 위해 강압적인 행태를 자행했다. 미리 조직돼 내려온 인민위원회·치안대·농민동맹·여성동맹 등이 미쳐 피란을 가지 못한 시민과 피난갔다 돌아온 시민들을 모아놓고 밤낮으로 못살게 굴었다. 인민군은 유엔군의 폭격이 뜸한 야간을 주로 이용해 시민들을 그들 조직체에 얽어매고 강제 동원, 도로와 교량 등을 복구하는데 사역시켰으며 심지어는 수십 리 수백 리 떨어진 지점까지 군량과 탄약 운반 등에 동원했다.
피란 못 간 사람들은 적군 치하 50일을 생지옥과 다름없는 가운데 갖은 곤혹을 겪어야만 했다. 인민군은 그들 나름대로의 행정체계를 갖추고 부농층과 지방 유지들을 색출해 소위 반동분자라는 올가미를 씌워 재산을 몰수하고 이른바 인민재판이라 하여 짜여진 각본에 따라 군중들을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잔악한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8월 15일까지 대구를 함락시키고 부산으로 진입하려던 공산군은 낙동강 영천 전투에서의 대패와 인천상륙작전으로 완전 전의를 상실하고 북으로 패주하기 시작했으며 50여일간 시달림에서 해방된 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란살이에서 돌아온 시민들은 잿더미로 변해 버린 정든 내 고향의 처참한 모습에 한때 넋을 잃기도 했다. 김천이 이처럼 피해가 컸던 것은 대구를 함락하기 위해 김천이 그들 공산군의 중요한 거점이요 전진기지였다는 사실과 대구 침공을 눈앞에 둔 8월 초순 김일성이 극비리에 이곳에 와서 이틀간 머물렀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으로 미뤄 볼 때 유엔군의 폭격이 격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김천중고등학교 설립자인 최송설당여사의 저택으로 궁중건축양식으로 건축된 정걸재에 김일성이 숙소로 이용돼 집중 폭격하는 바람에 소실됐다는 설이 전하는데 화려했던 정걸재는 사라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김천에 주둔한 미군부대

증산‧부항지서 전투 등 군과 경찰, 시민들의 눈물겨운 결사항전
인민군이 낙동강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적의 전열이 흔들리자 김천지역에서도 크고 작은 전투에서 눈물겨운 항전이 벌어졌다. 그 중에서 부항지서 전투와 증산지서 전투의 경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남로당계열 장교들이 주동한 여순반란사건이 진압된 후 국군에 쫓긴 좌익인사들이 지리산, 덕유산, 삼도봉 등 백두대간 일대로 잠입해 6‧25전쟁 직전까지 빨치산으로 활동하며 군경과 대치를 이어갔다. 부항면은 산악이 험준한 백두대간 삼도봉에 인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로 연결되는 요충지인 관계로 이들의 주요 근거지가 됐다.
1948년 12월 이후 부항면 일대에 공비들이 수시로 출몰해 관공서를 습격하고 마을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부항면민들은 부항지서를 빨치산에 대항하는 지휘소로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의했다. 지역 유지와 주민들로부터 찬조금을 받아 자재를 구입하고 부역을 자청했다. 부항지서 경찰관과 주민들은 지례면의 토건업자 박만성과 함께 1949년 4월부터 5월까지 2개월에 걸쳐 콘크리트 망루와 지서에서 망루를 연결하는 터널을 구축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도주로가 차단된 북한군들이 기존 백두대간에서 활동하던 빨치산과 합류해 규모가 천여 명에 이르러 ‘불꽃사단’이라 칭하며 부족한 식량과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수시로 부항면 일대 마을을 습격하고 부항지서를 공격했다. 당시 부항지서에 배치된 경찰 10여명으로는 대규모의 북한군과는 대적이 어려운 지경이었고 전시 중이라 지원 병력도 기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부항면의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지역청년들이 의용경찰과 대한청년단 부항단원이라는 이름으로 자원, 참전했다. 적의 침입에 대비해 의용경찰과 청년단원들은 각 마을별로 할당량을 배정해 나무를 조달하고 망루를 보호하기 위한 진지를 구축하며 전의를 다졌다. 1951년 10월 4일 오후 2시부터 5일 아침까지 적 병력 1,000명이 막강한 화력으로 부항지서를 공격했다. 소총에 의지한 경찰관과 의용경찰, 청년단원들은 망루로 투척된 적의 수류탄을 다시 던져내는 악전고투를 펼친 끝에 부항 망루를 지켜내는 우리 전쟁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또 10월 23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2차 공격이 이어졌는데 적들은 외부 지원 병력 차단을 위해 전화선을 절단하고 무풍지서를 습격해 노획한 박격포를 쏘아대며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었으나 경찰관과 의용경찰, 청년단원들은 혼연일체가 돼 적의 끈질긴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양 전투에서 적의 공격은 막아냈으나 안타깝게도 순경 김영수와 의용경찰 이천만, 이강필, 이말기 등 4인이 전사하고 최유철, 김종렬 등 다수가 총상을 입었다. 적의 부항지서 습격을 물리친 이후에도 의용경찰과 청년단원들은 군경과 함께 수색 작전에 참여해 삼도봉 일대의 적을 소탕하며 공을 세웠다. 이를 기념해 2019년 부항지서 망루 옆에 부항지서전투참전기념비가 세워졌다.

▲ 부항지서전투참전기념비

부항지서와 함께 대표적인 전적지로 꼽히는 증산지서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증산면은 수도산과 단지봉 등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여 당시에는 교통마저 불편한 산간오지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좌우익으로 갈려 극심한 이념 대립을 겪던 중 1948년 10월 1일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좌익계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인 검속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피해 좌익계 공비들이 달아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는데 이때 이들이 택한 곳이 증산면 산악지대였던 것이다. 이들은 수도산 일대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수시로 관공서와 민가를 습격하고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난 1948년 10월 19일 밤 12시, 공비 20여명이 증산지서를 습격해 교전 끝에 지서장 최판산 등 경찰관 4명이 전사하고 지서건물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증산면 청년들이 의용경찰대원으로서 참전해 공비 12명이 사살됐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공비들은 북한군 패잔병과 합세해 불꽃사단이라는 이름으로 1,000여명에 달하는 부대를 조직해서 산악지대를 장악했다. 수도산과 삼도봉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불꽃사단은 증산면 유성리에 주둔하던 국군 제877경비대와 수시로 교전이 벌였는데 1950년 10월 24일 밤 12시, 증산지서를 습격해 교전이 벌어져 지서장 이기식 등 경찰관 6명이 전사하고 11월 18일에도 경찰관 2명이 전사했다. 이후 군경은 1950년 11월 24일, 제877경비대와 특경대원, 의용경찰대원 등 200여명이 합동으로 새벽 4시를 기해 수도산의 적 근거지를 공격해 적 80명을 사살하고 13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경찰관과 의용경찰대원 다수가 희생되고 말았다.
1951년 2월에도 불꽃사단이 증산지서를 다시 습격해 순경 김시태, 최말술, 이복석이 전사했으며 적군 상사 김덕순이 투항 귀순해 의용경찰대원들에게 사격술을 교육시키는 등에 기여하다 전사했다. 1951년 7월 14일, 청암사에 적들이 집결해있다는 신고를 접한 김천경찰서에서는 경찰지원병 80명과 증산지서 경찰관, 의용경찰대원 등 120명이 밤 11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10여명을 사살했으나 중과부족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의 전투에서 당시 임시 증산면사무소로 사용 중이던 쌍계사가 공비들의 방화로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에도 증산지서 경찰관들과 의용경찰대원들은 공비 수색과 소탕작전에 참전하며 진정한 애국애족의 길을 몸소 실천했다. 2020년 증산지서 앞에 증산지서 전투 기념비가 세워졌다.
                                                                                                                           송기동(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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