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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기사

특집- 독립운동가 송준필宋浚弼과 원계서원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4.05.10 08:31 수정 2024.05.10 08:35

부곡동 서부초등학교 뒤 원골에 자리한 원계서원/ 김천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 체계적 관리 가능해져/ 송준필, 조선독립청원서(파리장서) 사건으로 투옥/ 일경 감시피해 성주에서 김천 부곡동 원골로 은거/ 평생 유학자로서 성리학 연구와 후학양성에 매진

△원계서원 전경(부곡동 원골마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헌신한 독립운동가와 전몰군경, 애국지사들의 뜻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가짐이 남다른 6월 호국보훈의 달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 고장 김천에도 수많은 분들이 계셨고 나름대로 포상과 그 정신을 기리고 있으나 부곡동 시내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 송준필과 그를 배향한 원계서원의 존재를 모르는 시민들이 의외로 많다. 호국보훈의 달을 앞두고 독립운동가 공산 송준필의 행적과 김천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원계서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부곡동 서부초등학교를 지나 고성산으로 이어진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원골이라 불리는 도심 속의 시골마을이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중앙에 고풍스런 기와집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성주 출신으로서 김천으로 이거해 평생을 독립운동과 성리학 연구, 후진 양성을 위해 일생을 살다간 공산 송준필을 제향하는 원계서원이다.
송준필은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에서 야성송씨 송기선과 영천최씨 부인의 차남으로 1869년 태어났다. 자는 순좌요, 호는 공산(恭山)이다. 15세에 ‘사서삼경’에 통했으며, 장복추,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업해 경학과 문사에 뛰어났다. 1905년 을사오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려다 실패했고 1910년 한일합방의 비보에 우국지사들과 국권회복에 헌신하려고 1912년 만주로 건너갔으나 부친이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3개월 만에 귀국하고 상을 당해 뜻을 펴지 못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야성송씨 종가인 백세각(百世閣)에 일가 친척을 모아놓고 궐기할 것을 당부했으며 백세각을 활동본부로 ‘조선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작성하기 위해 유림의 대표인 장석영·김창숙·송규선 등과 회합을 가졌다. 그 초안은 김창숙·송규선·곽종석이 작성키로 하고 송준필과 장석영은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을 촉구하는 국내 통문을 작성해 영남 일대 유림대표 137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송준필은 ‘파리장서’ 서명을 받는 도중에 보다 확실한 의지를 표명하려 장석영과 함께 ‘조선독립청원서’를 써 총독부에 직송하려다 발각돼 중단됐다.

송준필은 이기정·이기원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의 전말을 자세히 듣고 성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거사일을 4월 2일 장날로 정했다. 한편 유진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신자들도 궐기하려는 사실을 알고 연대하기로 결의했다. 4월 2일 오후 1시, 장꾼들이 시장으로 몰리는 틈에 송준필이 지휘하는 시위대가 합류하고 경산동 관제묘 뒷산에 집결했던 기독교 신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시장으로 집결하니 군중은 3천여명에 달했다.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천지를 뒤흔드는 속에 성주경찰주재소에서 발포를 개시하고 헌병대의 증강으로 밤 11시에 해산했다. 4월 12일 족질 송회근이 체포되면서 ‘파리장서’ 사실까지 발각돼 송준필은 재판에 회부되고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1923년 출소했다. 이후부터 일경의 감시와 탄압이 계속 이어지자 성주에서 김천 부곡동 원골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원계서당을 개설해 후진 양성을 하며 훗날을 기약했는데 문하에서 수백 명의 제자가 배출됐다.

그의 성리설은 주로 이황(李滉)의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따른 장복추의 영향 속에 형성됐다. 그는 성리설의 학통에서 이상정(李象靖)을 중시하여 주희(朱熹)와 이황의 정맥(正脈)을 이상정이라고 파악한다. 나아가 이황은 마음을 통합적(渾淪)으로도 설명하고 분별적(分開)으로도 설명한 데 반해 이이(李珥)는 통합적인 파악을 내세워 분별적 이해를 공격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덧붙여 이현일(李玄逸)·권상일(權相一) 등은 분별적 설명을 강조해 통합적 파악을 거부한 반면 이상정은 이러한 대립된 견해를 통합해 이황의 본래 의도를 발휘했다고 본다.

그는 당시의 다양한 성리설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하고 있다. 이진상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성인의 마음을 가리킨 것이라 지적하면서도 마음과 본성을 일치시켜 마음이 기질과 결합된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일치시킬 줄만 알고 분별해 이해할 줄은 모르는 것이라 비판한다. 또한 전우(田愚)의 성존심비설(性尊心卑說)은 본성을 이(理)로 보아 존중하는 것을 시인하면서도 마음을 본성과 상대시켜 비하했는데, 그는 이러한 견해를 거부했다. 당시에 성리학설이 심즉리설이나 심즉기설(心卽氣說)로 양극적 대립을 보이는 현실을 서로 이기려고만 드는 것으로 깊이 경계하면서 두 입장의 부분적 타당성을 인정하며 동시에 심합이기설로 통합할 것을 역설했다.
그는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제6도를 심화시킨 ‘심통성정삼도발휘(心統性情三圖發揮)’(1928)에서 송대 성리설과 퇴계 학통의 성리설을 정연하게 체계화시키고 나아가 자신의 성리설을 정립하고 있다. 이 저술은 20세기 초에 정리된 성리학설의 일대 집약이라 할 수 있다. 저서로는 ‘유림단독립운동실기(儒林團獨立運動實記)’, ‘심통성정발도삼휘(心統性情三圖發揮)’, ‘육례수략(六禮修略)’, ‘정학입문(正學入門)’, ‘명청강목속(明淸綱目續)’, ‘오선생미언(五先生微言)’, ‘사물잠집설(四勿箴集說)’ 등과 문집이 있다.

△공산문집
1943년 별세한 후 제자들이 서당에 숭덕사를 지어 제향했고 1969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숭덕사’라 쓴 친필 액자를 걸었다. 1971년 9월 24일 유림과 친족들이 국고보조를 보태어 숭덕사 앞에 원계서원을 건립해 일생을 독립운동과 후학양성에 전념한 송준필의 업적을 기렸다.

△공산 송준필 선생 묘소(성주군)

송준필의 아들 송수근(宋壽根)도 부친을 따라 김천으로 이거한 후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 송준필의 아들 송수근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기해 봉기한 이곳의 만세시위운동에 주동인물로 활동했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이기정(李基定)이 알게 되면서 송인집(宋寅輯)과 더불어 군내 양반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협의함으로써 본격적인 의거로 발전했다. 그는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의 주동자로 활동했으며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제출하는 ‘파리장서’에 서명하는 등 항일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피체됐다.
그 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에도 그는 1927년 신간회(新幹會) 성주지회(星州支會)를 조직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광복후에는 부친의 학문을 계승해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다 1969년 별세했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천시에서는 정부 또는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지역의 의미있는 문화재에 대해 김천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체계적인 보존을 시작했는데 다행히도 원계서원이 2023년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를 계기로 많은 시민들에게 원계서원과 송준필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을 이해하고 선양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송기동(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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