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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여름방학 때 가볼만한 김천의 명소

권숙월 기자 입력 2023.07.18 15:30 수정 2023.07.19 09:01

김천역사의 뿌리 감문국(甘文國)

삼한시대 김천지방 지배했던 변한계 소국 감문국
231년 사로국에 의해 멸망 후 신라 역사로 편입
1791년 만에 옛 왕궁터인 개령면 동부리에 부활
나라 국(國)자 사용하지 못한 미완의 역사 되찾아야

2022년 김천역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감문국을 테마로 한 감문국 이야기나라 조성사업이 완료됐다. 그 상징적인 공간으로서 개령면 동부리 동부연당 일대에 감문역사박물관, 수영장 등 대규모 공원이 조성돼 운영에 들어갔다. 부대시설로 운영되는 수영장은 하루 만에 예약이 완료될 정도로 인기 만점이라는 소식이다. 그러나 유쾌하지만은 않다. 서기 231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에 의해 멸망한지 1791년만에 역사박물관이 들어서는 등 감문국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가 세워졌으나 나라 국(國)자가 빠진 미완의 역사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여름방학과 휴가시즌을 맞아 자녀들과 함께 감문국과 관련된 유적지를 찾아감문국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도록 길잡이를 제공하고자 감문국의 역사와 관련 유적지를 소개해본다. 감문이 아닌 감문국이 하루빨리 될 수 있기를 염원하며. <편집자주>

↑↑ 감문국 주변 유적 분포도

△감문국 주변 유적 분포도
삼국시대 이전에 성립된 대부분의 소국이 그러하듯이 감문국 또한 1700여년의 풍상 속에 유적이 대부분 훼손되고 멸실돼 그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은 실정이다.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 한조(韓條)의 기록에 따르면 3세기 중엽 영남지방에는 진한계 12국과 변한계 12국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료를 통해 볼 때 주조마국(走漕馬國)과 감문국(甘文國)을 변한(弁韓)에 속한 김천지방의 소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김천지방에는 1990년 공단부지 조성과정에서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변에 위치한 구성면 송죽리 일대에서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층위적(層位的)으로 형성된 취락구조가 발견되면서 역시 감천의 중하류에 위치했던 감문국의 건국 주체와의 관련성을 새삼 주목하게 됐다.
감문국은 기원 전후로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많은 읍락국가 중의 하나로 신석기문화와 단절돼 새로운 청동기 문화인이 외부에서 이동해 성립했다기보다는 토착민에 의한 문화적 발전 과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다.
김천지방의 경우에도 구성면 송죽리 감천변에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유물이 대량 출토됐고 같은 감천 유역인 개령면과 감문면 일대에서도 동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인 지석묘가 집단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따라서 감문국의 건국주체는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에 걸쳐 감천유역에 산발적으로 집거하던 토착민 집단들이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의 전환기 무렵 상대적으로 유리한 생산기반을 가진 감천 중하류인 개령, 감문 일대로 이동해 주변의 읍락을 통합, 흡수해 형성한 대표 읍락국가로 볼 수 있다.
우리 사서에 감문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로 신라조(新羅條)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2년 7월조에 “以伊湌昔于老爲大將討破甘文國伊其地爲郡” 즉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감문국은 감천의 중하류에 위치해 비옥한 충적평야지를 기반으로 기원후 1세기경 성립돼 정치적 성장을 꾀하고 있었으나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전 단계에서 여타 소국에 비해 일찍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사로국 즉 신라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다.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후기의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관련 사료를 종합해 볼 때 감문국의 중심지는 현재의 개령면 동부리 일대이며 그 영역은 감문면과 아포읍, 어모면, 조마면까지 미쳤을 것으로 보며 일부 학자들은 선산 일대까지를 감문국의 영역으로 보기도 한다.
감문국의 국가 규모에 대해서는 특별한 근거는 없으나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진한, 변한의 규모를 “大國四五千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戶”라 한 것이나 중국측 사서로 추정되는 동사(東史)에 “牙浦叛大發三十夜渡甘川水見漲而退” 즉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삼십인의 대군으로 밤에 감천을 건너려 했으나 물이 불어나 되돌아 왔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볼 때 당시 감문국의 규모는 600 내지 700가구에 달하고 군사 30인을 대군(大軍)으로 표현할 정도의 국세를 보유한 정도의 소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아포에서 바라본 감문산

△아포에서 바라본 감문산 일대

(1)감문국의 흔적
親가야, 反신라 정책을 견지하며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던 감문국은 서기 231년 신라의 왕족이며 대장군인 석우로(昔于老)에 의해 토멸된 후 1700여년의 풍상 속에서 대부분의 유물이 멸실돼 온전한 형태의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각종 유적과 지명, 전설 등을 통해 감문국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다.



㉠감문산성(甘文山城)
감천 유역 일대에 드넓게 펼쳐진 평야지대가 감문국의 경제적 기반이었다면 해발 239미터의 감문산은 그 배후에 해당하는 진산으로 유사시 피난처 및 지휘소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감문산 정상부에는 능선을 따라 인위적으로 축조된 흔적이 뚜렷한 토성(土城)이 길이 200m, 높이 2.5m, 성폭 10m 남짓 남아있는데 특히 중앙부의 흙을 파내어 정상으로부터 바깥쪽으로 급경사가 되도록 쌓고 중심부를 평평하게 조성했다. 감문산은 달리 성황산(城隍山)이라고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감문산이 감문국의 내성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堡壘)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또 취적봉(吹笛峰) 또는 봉수산(烽燧山)으로도 불리는 바 이는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 산정상에서 피리를 불거나 봉화불을 피웠다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전하는데 봉수대의 흔적은 지금도 뚜렷이 볼 수 있다.

↑↑ 감문산성

△감문산성
㉡속문산성(俗門山城)
감문면 문무리와 송북리 사이의 속문산(俗門山) 해발 600m 지점에 산정 능선을 따라 동북으로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이 혼용돼 축조됐고 성북마을이 있는 동북쪽으로는 자연절벽을 그대로 활용했다. 확인된 성곽은 석축을 70cm 정도 하단에 먼저 쌓고 그 위에 토성을 쌓는 방식이 주를 이루며 높이는 250cm, 길이 800미터에 달하는데 석성은 대부분 무너지고 현재 일부만이 남아있다.
성내 북서쪽 끝부분에는 둘레 30m, 지름 10m, 높이 5m의 봉수대터가 남아있는데 지금은 무연고 묘지가 정상부에 들어서 있다. 군창지(軍倉址)로 추정되는 정상부 하단 평탄지에서는 지금도 무수한 와편(瓦片)이 산재해있고 건물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는 대형 주춧돌이 남아있다.


↑↑ 송문산성의 성벽

△속문산성의 성벽
㉢고소산성(姑蘇山城)
감문면 문무리와 어모면 구례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365m의 고소산(姑蘇山), 일명 성산(城山) 정상부로부터 50여m 아래에는 남북으로 길이 700m에 달하는 허물어진 석성이 남아있는데 멀리 속문산성과 마주 보는 형국을 하고 있다.
석성의 대부분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나 일부는 높이 5미터에 달하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성벽이 곳곳에 남아있으며 골짜기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정밀하게 축조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토성인 감문산성, 토성과 석성이 혼재된 속문산성과 달리 고소산성은 거의 대부분을 석재로 축성됐으며 인근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옹성(甕城)이 있었을 가능성 등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이전의 축조방식과 달리 가공한 석재를 이용해 한층 견고하면서도 세련된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 고소산성

△고소산성
②궁궐터(宮闕址)와 궁지(宮池)
감문산이 감문국의 내성(內城)이었다면 경제적 기반인 감천 일대의 농경지와의 중간지점인 동부리와 양천리 일대가 감문국의 중심인 궁궐지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감문국의 궁궐위치에 관해 ‘동국여지승람’과 ‘교남지(嶠南誌)’에는 “柳山北東院傍甘文國時宮闕遺基猶存” 즉 “유산의 북쪽 동원 옆에 감문국시대의 궁궐터가 남아있다”고 적고 있다.
각 문헌마다 공통적으로 유산 북쪽과 동원 옆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유산은 현재의 유동산(柳東山)을 가리키며 관용숙소였던 동원(東院)은 동부동에서 양천리로 넘어가는 역마고개 인근에 있었다는 점으로 미뤄 볼 때 역마고개마루 일대가 궁궐의 중심이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1960년대 말까지 양천리 487번지 육종철씨 자택 마당에 감문국시대의 궁궐초석이라고 전해지는 가공한 석재들이 몇기 남아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현재도 대문 앞에 일부가 돌출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감문국 개령지에서 궁궐지로 추정한 연당(蓮塘)은 현재도 유동산 아래 선산방면 지방도 옆에 일부가 남아있다.

↑↑ 궁권연못으로 전해지는 동부연당

△궁궐 연못으로 전해지는 동부연당
③금효왕릉(金孝王陵)
감문국 왕릉으로 전해지는 금효왕릉은 궁궐지로부터 감문산을 넘어 북쪽으로 8km 떨어진 현재의 감문면 삼성리(오성마을) 930번지 밭 가운데에 봉분높이 6m, 지름15m 크기로 김천지방에 남아있는 최대의 고분이다. 금효왕릉의 규모는 현재보다 큰 규모였다고 하나 오랜 세월 경작지로 잠식돼 전체적인 규모가 축소됐고 일제시대에 수차례 도굴돼 부장품의 존재 여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특별한 의미없이 말무덤으로 불리어왔는데 여기서 ‘말’은 곧 ‘크다’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보아야 하므로 말무덤은 큰무덤 곧 수장(首將)의 무덤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금효왕릉에 관해 ‘동국여지승람’과 ‘교남지’에는 “在縣北二十里有大塚俗傳甘文金孝王陵” 즉 “현의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전하기를 감문국 금효왕릉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 금효왕릉

△금효왕릉
④ 장릉(獐陵)
장릉 또는 장부인릉으로 불리는 이 고분은 개령면 서부리 웅현(熊峴)도로변의 옛 사자사(獅子寺)터 옆에 있는데 지금은 경작지로 개간이 되어 정확한 봉분의 형체를 분별할 수 없다. 구전으로 감문국시대의 어느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져 왔는데 향지 곳곳에 장릉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獐陵在縣西熊峴里俗稱甘文國時獐婦人陵”(장릉은 현의 서쪽 웅현리에 있는데 세상에서 말하길 감문국시대 장부인의 능이라고 한다)이라 적었다.
⑤고분(古墳)
개령면과 감문면 일대에는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묘제인 지석묘와 고분군이 산재해있는데 특히 감문면 문무리 마을 주변과 야산에는 수십기에 달하는 지석묘와 훼손된 석실분이 집단적으로 분포돼있어 감문국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개령, 감문 지방이 김천문화의 중심이었음이 입증됐다.

↑↑ 지석묘

△지석묘
(2)지명과 전설로 본 감문국
감문, 개령 일대의 지명과 전설에서도 감문국과 관련된 또는 신라와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들이 속속 등장한다.
①감문산(甘文山) 취적봉(吹笛峰)
감문국 읍치의 중심에 있는 진산으로 다른 이름으로 취적봉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감문국시대에 나라에 변고가 있거나 군사를 동원할 때 산에서 피리나 소라를 불었다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전한다.
②내황골(內皇谷)
개령면 양천리 당고산 뒷골짜기로 감문국의 왕비가 거처하는 내황실(內皇室)이 있었다고 전한다.
③동고산(㨂鼓山)
개령면 양천리 마을뒤 해발 140m의 야산으로 감문국시대에 나라에 변란이 생길 때 이 산에 걸어놓은 북을 쳐서 알렸다고 전한다.
④성안골(城內谷)
양천마을 뒤 감문산 골짜기로 감문국시대에 성을 쌓고 일반 백성들이 살았다고 전한다.
⑤진대골(陣大谷)
양천마을 앞 감천변 유동산 아래를 일컫는 지명으로 감문국시대에 군사들이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했다고 알려진다.
⑥세자궁터(世子宮址)
개령면 동부리 호두산 우측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옛 감문국시대 세자의 별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감문국 ‘개령지’에는 세자궁지와 관련해 “이 世子宮도 甘文國時節의 이야기니 史錄이 없음으로 未詳하나 今東部洞(舊校洞)虎頭山左側下이니 그 터에 只今 패구나무 五把나 되는 것이 옛말을 일러주는 듯하며 世稱이 터를 世子宮터라 하나니라”라고 적었다.
⑦애인고개 전설
애인(愛人)고개는 개령면 신룡리와 대광동 묘광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감문국과 신라가 대치할 당시에 신라총각과 감문국 공주가 사랑에 빠져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다 공주가 상사병에 걸려 고개마루에서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 애인고개

△애인고개
⑧나벌들,장수천 전설
나벌들은 개령면 신룡리 앞 평야지로 감문국시대 나(羅)씨 성을 가진 장군이 이곳에서 태어나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뒷날 감문국을 정벌한 신라 석우로 장군이 신룡리 하신마을 장수천(將帥泉)의 물을 마시고 감문국에 유명한 장군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장수천이 있던 하신마을을 폐동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⑨빗내농악
빗내농악은 김천을 대표하는 농악으로 감문국시대에 군사들이 진영(陣營)을 펼치고 조련하는 광경과 전쟁에 출전하거나 개선할 때 군사들을 위로하는 연희의 성격이 담긴 군사굿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김천지방 소국의 맹주였던 감문국이 주변의 아포국, 주조마국, 어모국, 배산국, 문무국 등 주변읍락을 다스리고 단합을 과시하기 위해 나라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나라제사, 동제사의 형태로 면면히 계승돼왔다. 특히 빗내농악의 발상지로 일컬어지는 빗내마을은 감문국 읍치인 개령군 동부리와 양천리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감문국이 여타 소읍락을 거느리는 국읍으로서 제천행사를 주관하던 제례의식이 군사조련과 결합돼 독특한 형태의 군사농악으로 발전했다.

↑↑ 빗내농악

△빗내농악

⑩원룡(元龍) 장군 전설
개령면 광천리 마을의 사달산(四達山) 너른골 기슭에는 원룡장군수(元龍將軍水)로 불리는 우물이 있는데 전설에 진동(陳童)이란 아이가 이 물을 먹고 힘이 세어져 감문국에 큰 공을 세우고 원룡 장군이 됐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또 진동은 사달산 용천바위를 깨어 마을 앞 개울에 다리를 놓았다고 하는데 어느 날 지고 내려오던 바위가 굴러떨어져 땅에 박혔는데 지금도 일대지명이 바위백이로 불린다. 그 바위가 수년 전까지 남아있었는데 경지정리 과정에서 묻혔다고 한다.


↑↑ 원룡 장군 샘

△원룡 장군 샘

<감문국의 역사적 의의와 우리의 몫>
삼국이라고 하는 고대국가의 기틀이 확립되기 이전에 성립됐던 무수한 소국의 존재는 승자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에 묻혀 그 유적과 기록이 너무나도 부족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당해 지방을 근거로 존립했던 소국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그 흔적을 찾는 노력을 부단히 진행해야 함은 선사시대로부터 고대국가의 기틀이 확립된 삼국시대를 연결시켜주는 역사적 징검다리이기 때문이며 지역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선결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산발적이며 무계획적으로 나열돼있는 개별문화유적을 연계하고 선별하는 과정을 통해 삼한시대 소국의 귀중한 역사적 자산을 관광 및 교육자원으로 활용하자는데 보다 큰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번에 감문국 관련 시설물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경상북도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반대로 역사적으로 엄연한 감문국임에도 불구하고 감문국에서 나라 국(國)자가 빠진 채 ‘감문역사자료관’으로 명칭을 정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빚어졌다.
수년 전 국비와 도비를 지원할 당시 감문국이야기나라 조성사업으로 명시해 예산지원이 결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2000년 전에 존재했던 소국 감문국의 유물과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감문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행태는 당초 예산지원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자기부정에 지나지 않는다.
김천시 행정 당국과 시민들은 감문국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감문이야기나라가 아닌 감문국이야기나라를 되찾는 노력에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번 여름 휴가와 방학 때는 1시민 1감문국 관련 유적 방문을 계획해 보길 유쾌하게 권해본다.
 
                                               자료제공: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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