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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양 김천문화원장 |
우리 고장 김천은 예로부터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이요, ‘영남제일문향(嶺南第一文鄕)’이라는 수식어로 불리어 왔다. 한반도 남부의 중앙에 자리하여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황악, 금오, 대덕 삼산과 감천, 직지 이수가 고장을 감싸 흐르는 형국이니 가히 천혜의 복 받은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말선초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주창하며 많은 유학자들이 이 고장으로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고 현인달사를 배출한 까닭으로 노촌 이약동, 매계 조위와 같은 대학자와 청렴한 관리를 배출해 영남에서도 제일가는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명성을 드높였다. 이러한 우리 고장의 문화적 위상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면면이 이어져 강중구 박사를 중심으로 1953년 12월 28일 김천문화원의 전신인 김천문화의 집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폭격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김천의 참상과 패배감에 잠긴 시민들을 문화운동을 통해 전후복구에 대한 의욕과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위한 김천문화의 집은 김천문화제라는 이름의 축제와 문화영화 상연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문화예술 활동을 펼쳐 김천의 문화적 위상을 크게 신장시켰다.
김천문화의 집은 1955년 김천문화관으로 개칭하고 현 중앙초등학교 교문 입구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문화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이어 1956년에는 어린이 문학상을 제정하고 교양강좌와 학생작품전시회, 사진촬영대회, 송년예술의 밤 등 당시로서는 생소한 문화예술행사를 개최해 지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57년 10월 17일부터 31일까지 제1회 김천문화제를 개최해 진주 개천재, 영월단오제와 함께 김천문화제가 전국 3대 문화제라는 평가를 받으며 김천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김천문화제는 전국 3대 문화제라는 위상에 걸맞게 다양하면서도 범시민적인 규모로 치러졌는데 백일장과 그림그리기대회, 웅변대회, 자전거하이킹, 민속놀이, 가장행렬이 펼쳐졌으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축하퍼레이드와 야간 폭죽, 공군축하비행 등 파격적인 규모로 전국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1962년 한국문화원연합회가 결성되면서 김천문화관이 김천문화원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향토문화의 보전과 전승까지 아우르는 향토문화단체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강중구 초대문화원장을 비롯한 초창기 문화원 임직원들은 1960년대 초부터 본격적인 문화예술활동과 여가선용을 위한 전용시설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문화센터건립구상에 들어가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각계의 지원과 시민성금을 모으고 부족한 자금은 사재를 충당하여 1965년 11월 25일 현재의 남산동에 김천문화센터를 준공하기에 이른다. 당시 민간이 주동이 되어 건립한 문화센터는 전국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김천문화센터 준공식을 축하하며 향토주민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전당이 되기를 바란다”는 치사를 보내오기도 했다.
김천문화센터는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어 전국 지역과 문화원 관계자들의 견학이 줄을 이었는데 1967년 6월 21일 정일권 국무총리가 방문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전국 최초로 일본 나나오시 미소기공민관과 국제 문화단체간 자매결연을 체결하여 문화교류의 폭을 국제적으로 확대하는 문화교류사에도 큰 획을 긋기도 했다.
1995년에는 금릉문화원과 김천문화원이 통합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문화 활동에 박차를 가하여 2011년과 2013년, 2019년, 2021년에는 4년 연속 대한민국 문화원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또한 향토문화 활동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수요가 증가하면서 2015년에는 김천문화원 자리에 시립문화회관이 신축되어 문화원 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세월은 흘러 이제 김천문화원은 개원 70주년이라는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김천시민들의 추억과 향수가 깃던 김천문화원, 김천문화센터는 지난날의 경륜과 성과를 바탕으로 보다 수준높은 문화프로그램을 갖추어 김천의 역사와 문화가 온기처럼 데워진 시민의 사랑방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