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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종합

삶의 향기- 솜이불을 시치며 

새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3.01.13 09:59 수정 2023.01.13 10:06

한외복(수필가)

감기 끝 체력이 고갈되고 딸 유학 떠난 빈자리가 헛헛하여 마음이 쑥대머리 같은 날, 호시절 지난 장롱 속 이불을 꺼내 빨아서 네 귀를 맞추어 헝클어진 시간을 가다듬었습니다
 백옥처럼 하얗게 빤 홑청을 깔아 솜을 얹고 그 위에 이불잇을 씌워 시치는 일은 많은 시간과 기술을 요했습니다. 이불 꿰매는 일은 네 귀를 반듯하게 잘 맞추는 일이 관건입니다. 넓은 곳에 펼쳐 놓고 네 귀를 팽팽하게 당겨 각을 세워야 하는데 혼자서는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맞춰야 제대로 맞추어집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불을 혼자 시쳤습니다. 처음에는 엄마 이불귀 맞추어 드리는 일을 도와드리다가 조금씩 꿰매보고 그러다 보니 혼자서도 꿰매게 되었습니다. 농사일에 바쁜 엄마가 해가 져서 돌아오셨는데 내가 시쳐 놓은 이불을 보시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농번기에 엄마 일손을 덜어준 어린 딸이 무척이나 대견했던 모양입니다. 그 때부터 조부모님 요이부자리 꿰매는 일은 내 차지가 되었습니다. 시어른들 바지저고리를 손질하시는 것만으로도 엄마의 손은 농한기에도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요즘 누가 꿰매는 솜이불을 덮으랴마는 돌아가신 할머니와 지금은 할머니가 된 젊었던 엄마가 손수 농사지어 딴 목화로 만든 것이라 지금까지 장롱을 지키고 있습니다.
 
내 유년 집 앞산 화전에 목화를 심었습니다. 척박한 비탈밭에 노랑나비 같은 꽃이 화르르 피어 붉은 빛으로 지면 달짝지근한 물을 머금은 다래가 맺혔습니다. 오이며 호박 뽕나무를 함께 심었던 화전에 엄마 일하러 가시는 날이면 난 목화 대궁 사이에 들어앉아 배가 부르도록 다래를 따 먹었습니다. 다래를 목화로 피워야 하는 엄마는 벌레 있다고 저어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래를 톡톡 눌러서 단물을 빨아 먹었습니다.
 홧홧한 한여름의 열기가 가실 즈음 하늘의 뭉게구름이 밭에 내려앉은 듯 몽실몽실한 목화가 하얗게 피어났습니다. 여름과 가을의 길목 하늘에 우기가 보이면 화전으로 달려가 목화 따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단단하게 굳어진 다래 껍질 속에서 목화를 뽑아내는 일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목화를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목화를 꽉 물고 있는 다래 껍질이 가시처럼 뾰족했습니다. 다래 껍질이 어린 조막손을 할퀴어도 풋다래를 따먹으면서 쏙쏙 목화를 뽑아내는 일이 놀이처럼 재미있었습니다.
 목화 속에 박힌 쥐똥 같은 새까만 씨앗을 빼내고 햇빛 아래 널어 두면 햇빛을 몸속에 품어 몸을 한껏 부풀렸습니다. 그렇게 모은 목화로 이불을 만들었습니다.
나일론이 보급되고 화학제품이 쏟아지는 산업근대화에 밀려 드넓은 목화밭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근대화에 발맞추어 온 동네 사람들이 목화 농사를 작파하여도 엄마는 장래 두 딸의 혼수를 목적으로 몇 년 더 목화 농사를 지었습니다.

 목화를 솜타는 집에 맡겨 이불솜을 만드셨고 포목점에서 제일 좋은 비단 이불감을 떠다가 비단금침을 만들어 두 딸을 출가시켰습니다. 혹독하게 추운 시절을 건너온 엄마의 이불 평가는 솜이불만 진짜 이불이었고 솜이 많이 들어가야 좋은 이불이었습니다. 이불솜이 많이 들어간 이불을 가치 있게 생각하며 엄마가 만든 내 결혼 이불은 무거워 들지 못할 정도로 많이 넣었습니다.

둘째 딸 시집가는데 몇 년 동안 예비했던 목화를 아낌없이 다 넣어 이불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무거운 그 솜이불은 신혼 빛이 퇴색되기도 전에 캐시미어 솜이 들어간 차렵이불로 바뀌고 비좁은 장롱 속 애물단지가 되었습니다.
 
또 세상은 뒤바뀌어 물 건너 온 수입품이 자랑이었던 때가 가고 옛것이 좋고 친환경적인 우리 것이 몸에 좋다는 붐이 일어 장롱 속 이불도 밖으로 나왔습니다. 발달하는 문명을 따라서 이불도 진화하여 차렵이불이 나오고 양모솜 명주솜이 으뜸이라고 하나 적당한 무게감과 포근함이 주는 안온함은 목화솜 이불을 따라 올만한 게 없습니다. 다만 꿰매는 일이 번거로워 기피하지만 지퍼나 단추를 달면 간단히 해결될 일입니다.

 두꺼운 비단금침을 사용하기 편리하게 모두 개조하고 한 채는 남겨 옛 것을 고집하여 꿰매 유년의 추억을 우려먹고 있습니다. 흰 무명수건을 쓰고 무명치마저고리를 입고 밭고랑에서 목화 따시는 엄마가 이불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힘들 때 나이가 들어갈수록 쳐다만봐도 위로가 되는 이불입니다.

이불과 함께 마음을 빨아 반듯하게 펴서 각을 세우고 남은 시간을 촘촘하게 꿰맸습니다. 오늘밤 새로 시친 새물내 나는 이불을 덮고 목화밭 다래 따먹던 호시절의 꿈을 꾸어볼까 합니다.
호시절 지난 너와 나 주눅 든 각을 세우고 쭈그러진 구김을 펴고 남은 시간 촘촘히 꿰매어 새뜻해지는 거야, 오는 봄처럼!

*구성면 출신의 한외복 수필가는 현재 구미에서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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